만덕사(萬德寺)는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현재는 작은 규모의 사찰이지만, 그 터(만덕사지)의 규모와 출토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대규모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와 창건
만덕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정확한 기록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따르면 고려의 개국 공신인 노강필(盧康弼)과 이엄(李嚴)이 927년(고려 태조 10)에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편 《불교사전》에는 '만덕사 경상남도 동래군 우이면 만덕리에 있는 절, 1391년(고려 충정왕 3년) 창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근거 역시 명확하지 않다. 출토된 기와와 석조유물의 양식으로 보아 창건 연대는 고려 초 또는 통일신라 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규모와 유적
만덕사지는 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절터의 중앙부에는 동서 68m, 남북 54m, 높이 4m에 달하는 장방형 축대가 있으며, 이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축대를 중심으로 뒤편과 동북·서북쪽 200m 지점에도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의 초석이 있으며, 서남쪽 150m 지점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당간지주는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1년 동아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는 신라시대 회청색 격자문 토기조각, 고려시대 회청색 무문 토기조각, 청동제 인왕상(길이 11cm), 각종 와당 등 12가지 유물이 수습되었다. 1990년과 1996년에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 내부를 발굴조사하여 동서 24.9m, 남북 20.4m의 금당지를 확인하였다. 발굴에서는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과 귀목문 암막새, 대규모 치미, 8각석조대좌, 연화대좌, 청자와 분청사기 등의 도자기류, 석등의 보주, 석탑의 노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기비사(祇毗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된 점이다. 이는 문헌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절 이름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기비현'이라는 현재의 만덕고개를 지칭하는 지명이 있어 기비사와의 관련성이 시사된다.
역사적 사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충혜왕의 서자 기(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 5년에 공민왕이 석기를 소환하여 순군에 가두었고, 공민왕 22년인 1373년에 석기는 참수되면서 추대 음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다만 만덕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전국에 여러 곳 있어, 이 기록의 만덕사가 부산 만덕동의 만덕사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고려가 망한 후 고려의 왕손들이 만덕사로 피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폐사와 현재
만덕사의 폐사 시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의 지리지에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금동사라는 소암자의 석탑과 석등, 분청사기의 출토 등으로 보아 마지막 폐사는 임진왜란 때로 추정되기도 한다. 국가유산포털에는 사찰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3년 만덕로가 동서로 관통하면서 주위가 대규모 주택단지로 개발되어 절터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1986년 승려 금산(金山)이 만덕사지에 가건물을 지어 현재의 작은 사찰이 되었다. 만덕사지에서 수습된 삼층석탑은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참고 사항
만덕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은 전국에 여러 곳이 존재한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도 만덕사가 있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도 만덕사가 있다. 또한 전라남도 순천시 만덕산에는 백련사가 위치해 있어 '만덕사'라고도 불렸던 기록이 있다. 따라서 '만덕사'라는 명칭은 특정 단일 사찰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사찰에 사용된 이름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