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 사다나오(牧野貞直, 1831~1887)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다이묘(大名)로, 히타치(常陸) 가사마번(笠間藩)의 제8대 번주를 지냈다. 나리사다계 마키노 가문(成貞系牧野家)의 제11대 당주에 해당한다.
생애
마키노 사다나오는 1830년(분세이 13년) 11월 27일(구력), 제3대 번주 마키노 사다하루(牧野貞喜)의 아들인 부세 시게마사(布施重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가는 가사마번 제7대 번주이던 사다히사(牧野貞久)의 집이었으며, 사다히사가 1850년(가에이 3년)에 사망하자 사다나오는 1851년(가에이 4년)에 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푸사부로(鋪三郎)였다.
번주 취임 이후 막부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54년(가에이 7년)에 에도성 사쿠라다몬(桜田門) 문지기, 1858년(안세이 5년)에는 에치추노카미(越中守)로 승진하는 등 관직에 올랐다. 1860년(만엔 원년)에는 소샤반(奏者番)과 지샤부교(寺社奉行, 사찰과 신사의 행정을 담당한 막부 관직)에 임명되었다.
1864년(겐지 원년)에는 당시 히타치 지역에서 일어난 덴구토의 난(天狗党の乱) 진압에 막부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오사카성대(大坂城代)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의 서일본 정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다.
보신 전쟁과 말년
1868년(게이오 4년) 보신 전쟁의 서막이 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마키노 사다나오는 오사카성대의 지위에서 막부 측에 참여하였으나 구막부군이 패배하자,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해로로 도주한 것과 달리 그는 가신 3명을 데리고 육로로 에도까지 피신하였다. 이후 1월 20일에 오사카성대를 사임하였다. 한편 번 내부에서는 좌막파(佐幕派)와 존왕파(尊王派)가 대립하여 내분이 발생했으며, 마키노 사다나오는 신정부 측에 귀속하여 4월에 우쓰노미야번에 대한 출병에 참여하였다.
1869년(메이지 2년)에 장남 사다야스(貞寧)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은거 후 이름을 '사다나오(貞直)'로 개명하였다. 이는 번주 재임 시절에는 '사다아키(貞明)', '사다토시(貞利)' 등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별호로는 '조쿠조(竹杖)'라는 하이쿠 호를 사용했다. 1887년(메이지 20년) 1월 13일에 사망하였으며, 향년 58세였다. 그의 무덤은 도쿄도 스미다구에 있는 요츠지 사(要津寺)에 있다.
관직 및 작위
마키노 사다나오는 에도 막부에서 소샤반, 지샤부교, 오사카성대를 역임하였다. 관위는 종5위하(従五位下)였으며 관직명은 에치추노카미였다. 역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 이에사다, 이에모치, 요시노부의 4대에 걸쳐 섬겼다.
가족 관계
마키노 사다나오의 실부(實父)는 부세 시게마사, 실모는 마쓰바라씨(松原氏) 출신의 후사 여(ふさ女)로 알려져 있다. 양부는 마키노 사다히사였다. 정실인 마사 여(雅女)는 마키노 사다히사의 양녀로, 마키노 사다카쓰의 딸이었다. 측실로는 가시와기씨(柏木氏) 출신의 교젠인(教善院)이 있었다. 자녀로는 장남 사다야스(貞寧)를 비롯해 구니마루, 데이마루, 산지로, 조자부로 등의 아들들이 있었으며, 딸 후미(富美)는 마쓰다이라 나오유키(松平直之)에게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