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대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본 제국군이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마닐라 전투가 한창이던 시기에 일본군이 미군 및 필리핀군에 의해 포위되자, 퇴각하거나 패배가 임박한 상황에서 마닐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다.
배경 1944년 말, 미군은 필리핀 탈환 작전을 개시하여 레이테만 전투를 통해 필리핀 해상권을 장악하고 루손섬으로 진격했다. 1945년 1월, 미군과 필리핀 연합군은 수도 마닐라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마닐라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병력과 물자 부족으로 인해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육군 병력의 대부분이 마닐라 외곽으로 철수하고, 주로 해군 병력으로 구성된 마닐라 해군방위대(약 16,000명)가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해군 소장의 지휘 아래 도시에 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사건 경과 마닐라 전투는 시가전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일본군은 미군의 강력한 공격과 패색이 짙어지자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마닐라에 갇힌 약 100만 명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살해, 고문, 강간, 약탈을 자행했다. 특히 이와부치 부대는 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건물을 요새화하면서 안에 갇힌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퇴각 과정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을 한곳에 모아 총검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쏴 죽였으며, 불태워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스페인 영사관, 성 바오로 수녀원,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 등 여러 장소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피해 규모 및 영향 마닐라 대학살로 인한 정확한 사망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10만 명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닐라 인구의 상당수에 해당하며, 필리핀 역사상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와 함께 마닐라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어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아름다운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전후 처리 마닐라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와부치 소장을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육군 대장(당시 필리핀 방면군 사령관)은 마닐라 대학살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의 잔혹 행위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닐라 대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저지른 가장 악명 높은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필리핀과 일본 간의 역사적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