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나 마리아 마그달레나 "마그다" 괴벨스(Johanna Maria Magdalena "Magda" Goebbels, 1901년 11월 11일 ~ 1945년 5월 1일)는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아내이다.
생애 초기
마그다는 1901년 11월 11일 독일 베를린에서 미혼모 아우구스테 베렌트와 기술자 오스카 리첼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해 말 결혼하였으나 1904년 또는 1905년경 이혼하였다. 다섯 살 때 어머니에 의해 쾰른으로 보내져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1908년 어머니가 브뤼셀에 거주하는 유대인 상인 리하르트 프리들렌더와 재혼하였고, 마그다는 그에게 입양되어 프리들렌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2016년 역사학자 올리버 힐메스의 연구에 따르면 프리들렌더가 마그다의 생물학적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브뤼셀에서 마그다는 빌포르드의 우르술라 수녀원 학교에 다녔으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첫 번째 결혼
1920년 기차에서 독일의 대기업가 귄터 크반트(당시 40세)를 만나 1921년 1월 4일 결혼하였다. 1921년 11월 1일 첫 아들 하랄트 크반트가 태어났다. 그러나 남편이 사업 확장에만 몰두하면서 결혼 생활에 불만을 느꼈고, 1929년 외도 사실이 발각되어 이혼하였다. 이혼 조건은 마그다에게 매우 유리하게 주어졌다.
나치당 가입과 요제프 괴벨스와의 결혼
1930년 나치당 집회에서 연설자 요제프 괴벨스에게 감명을 받아 1930년 9월 1일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지역 나치 여성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당 본부에서 괴벨스의 개인 문서를 관리하게 되었고, 1931년 2월 바이마르 여행 중 괴벨스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1931년 12월 19일 아돌프 히틀러를 증인으로 하여 결혼하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결혼이 히틀러의 의도에 따라 마그다가 나치 독일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주선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마그다는 히틀러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히틀러의 소수 여성 측근 집단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정권의 비공식적 대표자 역할을 하며 독일 전역의 여성들로부터 가사나 양육권 문제에 관한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자녀
요제프 괴벨스와의 사이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헬가(1932), 힐데(1934), 헬무트(1935), 홀데(1937), 헤다(1938), 하이데(1940).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하랄트 크반트는 전쟁 중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였으며 생존하였다.
전쟁 시기
전쟁 발발 후 마그다는 적십자 간호사 훈련을 받고 텔레풍켄 전자회사에서 근무하며 애국적 어머니상을 실천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동부 전선에서 불리해지면서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42년 11월 히틀러의 연설을 듣던 중 라디오를 끄며 "맙소사,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1944년에는 히틀러에 대해 "그는 더 이상 이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후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하자 괴벨스 가족은 총리관저 지하의 퓌러벙커로 이동하였다. 4월 30일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다음 날인 5월 1일, 마그다와 요제프 괴벨스는 SS 치과의사 헬무트 쿤츠의 도움으로 여섯 자녀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여 의식을 잃게 한 후 사이안화 칼륨(청산가리) 앰플을 물려 살해하였다. 이후 마그다는 남편과 함께 총리관저 정원으로 올라가 자살하였다. 시신은 휘발유로 불태워졌으나 완전히 소각되지는 않았으며, 다음 날 소련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유해는 1970년 소련 KGB의 명령에 의해 발굴되어 소각된 후 강에 흩뿌려졌다.
역사적 평가
마그다 괴벨스는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히틀러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헌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생애는 나치즘에 대한 개인적 신념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