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李泳禧, 1929~2010)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대학교수, 진보적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평창(平昌), 호는 향사(鄕史)이다.
생애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아버지 리근국과 어머니 최희저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삭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립공업학교에 다니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이후 국립해양대학교(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복무하였다.
1957년 소령으로 예편한 후 기자가 되어 1957~1964년 합동통신 외신부, 1964~1971년 조선일보사와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을 지냈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고, 1972~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6년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 복직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고, 1984년에 복직되었다. 2010년 12월 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기자 시절 4·19혁명을 경험하였고, 조선일보사 외신부에서 근무하며 1964년 남북 유엔 동시 가입 관련 기사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되는 필화사건을 겪었다. 외신부 재직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추었으며, 한국 상황에 관한 기사를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권과 신문사의 압력을 받아 조선일보사에서 반강제로 퇴사하고 합동통신사로 이직하였으나, 1971년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해 재차 해직되었다.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이사로 참여하였다. 197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2년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80년 5월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하였다가 재차 해직되었고, 같은 해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당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19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고문 및 이사직을 맡았으며, 1989년 『한겨레』의 방북 취재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평생 9차례 연행, 5차례 구속되었으며, 총 1,012일간의 수감 생활을 하였다. 2003년에는 이라크전 파병 반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문과 저술 1974년 사회비평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8억인과의 대화』(1977), 『우상과 이성』(1977),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역설의 변증』, 『역정-나의 청년시대』, 『자유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베트남전쟁, 중국 문제 등 국제 정세로부터 한국의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을 통해 1970~1980년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사상의 은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상훈 1989년 주한외국인기자협회 자유언론상, 1995년 단재학술상, 1999년 늦봄통일상, 2000년 만해상 실천상, 2006년 심산상·기자의혼상·단재언론상, 2007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08년 후광 김대중 학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2년에는 리영희재단이 출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