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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덩후이

리덩후이(李登輝, 병음: Lǐ Dēnghuī, 한자음: 이등휘, 1923년 1월 15일 ~ 2020년 7월 30일)는 중화민국(타이완)의 정치인이자 농업경제학자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한 인물이다. 타이완에서 출생한 본성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총통직에 올랐으며, 타이완의 민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생애 및 학력

리덩후이는 1923년 일본 제국 통치 시기였던 타이완 다이호쿠 주 싼즈(현재 신베이시 싼즈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식 창씨개명을 통해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교토 대학 농학부 농림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일본 육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전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68년 코넬 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치 경력

리덩후이는 1972년 장징궈 당시 행정원장에 의해 정부에 발탁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하였다. 1984년 장징궈 총통의 부총통으로 임명되었으며, 1988년 1월 장징궈의 사망으로 총통직을 승계하였다. 이후 국민당 주석을 겸직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주요 정치적 업적

리덩후이의 재임 기간 동안 타이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첫째, 중화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총통 직선제를 도입하여 1996년 최초의 직접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그는 5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둘째, 국민대회(國民大會)를 폐지하고 대만성 정부 기관을 축소하는 등 정치 제도 개편을 추진하였다.

셋째, 기존의 대륙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중화민국을 추구하는 정책 방향을 설정하였다. 1999년에는 '양국론'(兩國論)을 발표하여 양안(兩岸) 관계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긴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퇴임 이후

2000년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는 공식적으로는 국민당의 롄잔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 후보에게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그는 국민당에서 축출되었으며, 이후 타이완단결연맹을 창당하였다. 퇴임 후에는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친일 성향의 행보를 보여, 국민당, 민주진보당,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평가

리덩후이는 타이완의 민주화를 주도한 인물로 학계와 정치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한편, 그의 친일 성향과 양국론 발언 등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대만 정치인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가운데, 그의 친일 성향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반면 타이완 민주화 및 독립 노선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학계 차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리덩후이는 2020년 7월 30일 타이베이시에서 9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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