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촨-핑몐 전쟁(麓川平緬戰爭)은 15세기 중반, 명나라가 오늘날 중국 윈난성과 미얀마 국경 지역에 위치한 몽 마오 왕국(麓川, 루촨)의 샨족 세력과 벌인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통칭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쟁은 명나라 정통제(正統帝) 재위 기간에 주로 전개되었다. '루촨'(麓川)과 '핑몐'(平緬)은 각각 명나라와 미얀마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지역의 명칭으로, 오늘날의 룽촨현(隴川縣)과 루이리시(瑞麗市) 일대를 가리킨다.
배경
몽 마오 왕국은 명나라 초기부터 윈난성 남부 및 상미얀마 지역을 아우르는 샨족(태족) 계열의 세력으로, 원나라 시기에는 '평면선위사'(平緬宣慰司)로 불리기도 했다. 명나라가 윈난을 정복한 이후 이 지역은 '루촨평면군민선위사'(麓川平緬軍民宣慰司)로 편제되어 명나라의 토사(土司) 체제에 편입되었다.
1398년 명나라와 몽 마오 왕국 사이에 군사적 분쟁이 발생한 이후, 몽 마오 왕국 내부에서는 권력의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이후 몽 마오 왕국은 시 칭파(思行發)가 주도하게 되었으나, 1413년 조공 무역을 무시하고 중국 사신을 억류한 일로 인해 축출되었고, 그의 동생인 시 렌파(思任發)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1413년부터 1433년까지 약 20년 동안 지역 여러 왕국들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으며,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중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1436년 시 렌파가 세금 면제를 요청하여 정통제가 이를 허락한 이후, 1437년 11월 시 렌파는 주변 지역을 침범하여 영토를 병합하기 시작했다. 이에 윈난성의 명나라 군사령관 무성(沐晟)이 몽 마오 왕국의 불법적 영토 확장을 보고하면서 명나라 조정은 군사적 대응을 결정하게 되었다.
전개
명나라의 군사 원정은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된다.
첫 번째 원정(1438년~1439년)에서는 무성 장군이 지휘를 맡았으나, 시 렌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명군은 패배를 겪었다. 이후 정통제는 더욱 대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두 번째 원정(1441년~1442년)에서는 명나라의 명장 왕기(王驥)와 장귀(蔣貴)가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었다. 1441년 12월 명군은 루촨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약 8만 명 이상의 루촨 군사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시 렌파는 가족과 함께 미얀마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시 렌파는 미얀마 국왕에게 붙잡혔으며, 1445년 명나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세 번째 원정(1443년~1444년)은 시 렌파의 아들 시 기파(思機發)가 루촨 지역으로 복귀하여 반란을 재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명군은 시 기파를 추격했으나 완전한 소탕에는 실패하였다.
네 번째 원정(1448년~1449년)에서는 시 기파가 망양(孟養) 지역에서 세력을 재정비한 데 대해 왕기가 다시 원정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소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명군은 시 렌파의 아들 시록(思祿)과 협정을 맺고 금사강을 경계로 하여 철수하였다.
결과 및 영향
루촨-핑몐 전쟁의 결과, 루촨(몽 마오) 왕국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명나라의 윈난 지역 지배는 강화되었다. 명나라는 루촨 지역에 농천선무사(隴川宣撫司)를 설치하여 직접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명나라에 상당한 군사적·경제적 부담을 초래하였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군대가 남방 전선에 동원되면서 북방 몽골 방어가 약화되었다는 지적이 있으며, 1449년의 토목의 변(土木之變)에서 명군이 크게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이 전쟁이 지목되기도 한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윈난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명나라의 남방 제토사(諸土司)에 대한 위신도 하락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학자들은 첫 번째 원정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추가 원정은 과도한 군사 행동이었다는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