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앙투안 다르투아 (프랑스어: Louis Antoine d'Artois, 앙굴렘 공작, duc d'Angoulême, 1775년 8월 6일 ~ 1844년 6월 3일)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도팽(Dauphin)이자 프랑스의 명목상 국왕이었다. 그는 샤를 10세 국왕과 마리 테레즈 드 사부아의 장남으로, 루이 16세의 조카이자 루이 17세의 사촌이 된다.
생애 초기 및 혁명기의 망명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1789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사촌이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생존 자녀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와 1799년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주로 영국, 독일, 러시아 등지를 전전하며 프랑스 왕정복고를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및 군사 활동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왕실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며, 1823년 스페인 원정(프랑스 군의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 진압)에서는 프랑스 군을 지휘하여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고 부르봉 왕가의 페르난도 7세의 복위를 도왔다. 이 공로로 그는 큰 명성을 얻었다.
7월 혁명과 짧은 통치 1824년 아버지 샤를 10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는 프랑스의 도팽(Dauphin, 왕세자)이 되었다. 그러나 샤를 10세의 반동적인 정책은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1830년 7월 혁명(Trois Glorieuses)이 발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 압력을 받았다. 1830년 8월 2일, 샤를 10세는 자신과 앙굴렘 공작의 아들인 앙리 다르투아(샹보르 백작)를 위해 퇴위하였다. 이로써 형식상 루이 앙투안 다르투아가 잠시 동안 루이 19세(Louis XIX)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퇴위 선언문에 자신 역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즉시 추가하여 서명하였고, 이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는 "20분 왕"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말년과 죽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을 거쳐 오스트리아 제국의 고르지아(Gorizia, 현 이탈리아 고리치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1844년 6월 3일, 그는 고르지아에서 사망했으며, 자녀가 없었으므로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인 앙리 다르투아(샹보르 백작)가 부르봉 왕가의 정통파 계승자가 되었다.
역사적 의미 루이 앙투안 다르투아는 프랑스 부르봉 왕정의 마지막 도팽이자, 프랑스 혁명과 왕정복고, 그리고 7월 혁명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20분 통치" 일화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쇠퇴와 마지막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