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사 데 구스만(Luisa de Guzmán, 포르투갈어: Luísa de Gusmão)은 1613년 10월 13일 스페인 우엘바에서 태어나 1666년 2월 27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사망한 스페인 출신의 귀족 여성으로, 포르투갈 왕비이자 섭정이었다. 본명은 루이사 마리아 프란시스카 데 구스만 이 산도발(Luisa María Francisca de Guzmán y Sandoval)이다.
생애 초기
루이사는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8대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 이 실바였고, 어머니는 후아나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데 라 세르다였다. 그녀의 친할아버지는 제7대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페레스 데 구스만 이 소토마요르였으며, 친증조할머니는 에볼리 공주 아나 데 멘도사 이 실바였다. 모계를 통해서는 포르투갈 왕 페르난두 1세의 서녀인 비제우 영주 이자벨의 후손이기도 하다.
1633년,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 그녀는 포르투갈의 고위 귀족인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과 결혼하였다.
왕비 시절과 독립 전쟁
164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포르투갈 혁명 당시 루이사는 남편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남편이 포르투갈 왕위를 수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가 포르투갈 왕위 수락을 망설이는 남편에게 한 말로 유명한 어구가 전해진다: "나는 평생 공작부인으로 사느니, 하루라도 왕비가 되겠다"(Antes rainha um dia que duquesa toda a vida). 일부 기록에서는 '하루' 대신 '한 시간'이라고도 전해진다.
1641년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는 가미냐 공작 등 관련 귀족들의 처형을 지지한 의회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섭정 시기
1656년 남편 주앙 4세가 사망하자, 어린 아들 아폰수 6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루이사는 정치적으로 매우 예리했으며, 잉글랜드와의 새로운 동맹을 성사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녀의 딸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는 잉글랜드 왕 찰스 2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아폰수 6세는 정신적으로 통치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지적 능력 부족뿐만 아니라 난폭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보였다. 1662년, 국왕이 측근들과 함께 밤중에 리스본을 공포에 몰아넣은 사건 이후, 루이사와 의회는 이에 연루된 국왕의 측근 일부를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분노한 아폰수 6세는 카스텔루멜로르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고, 루이사의 섭정 통치는 종료되었다. 이후 그녀는 수녀원으로 은퇴하여 1666년 사망하였다.
자녀
루이사 데 구스만은 주앙 4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두었다.
- 테오도시우, 브라질 공자(1634~1653) - 미혼으로 사망
- 아나 드 브라간사(1635) - 출생 직후 사망
- 조아나, 베이라 공주(1635~1653) - 미혼으로 사망
- 카타리나 드 브라간사(1638~1705) - 잉글랜드 왕 찰스 2세와 결혼
- 마누엘(1640) - 출생 직후 사망
- 아폰수 6세(1643~1683) - 포르투갈 왕
- 페드루 2세(1648~1706) - 포르투갈 왕
역사적 평가
루이사 데 구스만은 스페인 출신이면서도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의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통찰력은 브라간사 왕조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이후 포르투갈의 대외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유해는 브라간사 왕가의 판테온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