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피나 전투는 기원전 46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티투스 라비에누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원로원파) 군이 아프리카 속주 루스피나(현재 튀니지 모나스티르 인근)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카이사르의 내전 중 제2차 아프리카 전선에 속하는 교전으로, 이후 탑수스 전투로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 작전 중 하나였다.
배경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전쟁과 폰토스 왕국 원정(젤라 전투)에 묶여 있었다. 그 사이 발칸 반도에서 탈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세력을 규합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카이사르의 전 부관이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부관을 맡았으며, 소 카토가 우티카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누미디아 왕 유바 1세도 이들을 지원했다. 기원전 46년 무렵 옵티마테스파는 10개 군단, 다수의 경무장 보병과 기병, 120마리의 코끼리,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7년 12월 말, 카이사르는 시칠리아 릴리바이움에서 6개 군단과 2,000기병을 모아 아프리카로 출항했다. 폭풍으로 함대가 흩어져 하드루멘툼 인근에 상륙한 카이사르는 불과 3,000명의 보병과 150명의 기병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렙티스를 점거한 뒤, 30개 코호트(약 9,000명), 400기병, 150명의 투석병을 이끌고 식량 확보에 나섰다.
전투 경과
카이사르가 보급품 확보를 위해 행군하던 중, 진영에서 약 4.5km 떨어진 지점에서 적군이 나타났다. 라비에누스는 기병들 사이에 누미디아 경보병대를 배치한 채 좁은 대열로 행군하게 하여, 카이사르의 정찰병들이 이를 보병대 위주로 오인하게 만드는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실제로 라비에누스 군의 핵심은 8,0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를 뒤늦게 깨닫고 군단병들에게 사각형 방어 진형을 세우게 했다. 라비에누스는 경보병대를 먼저 파견하여 화살을 퍼붓게 한 뒤, 누미디아 기병대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카이사르군을 압박했다. 카이사르군은 사막의 더위와 갈증 속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 익명의 저자가 기록한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주위를 돌며 야유를 퍼부었고, 이에 10군단의 한 병사가 필룸(투창)을 던져 라비에누스의 말을 죽이는 일화가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대형을 변경하여 일부 코호트는 기병대에, 나머지는 경보병대에 대응하게 한 뒤 필룸 투척과 함께 돌격을 감행했다. 라비에누스군은 일시 후퇴했으나, 이때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1,600명의 갈리아 및 게르만 기병과 많은 보병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합세했다. 카이사르군은 테스투도(거북) 진형으로 방어하다가 쐐기 대형으로 반격하여 적 경보병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 페트레이우스도 부상당했다. 해질녘까지 양군은 지친 상태로 각자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결과 및 이후
다음 날 새벽 카이사르는 본영으로 철수했고, 페트레이우스는 "스키피오의 몫을 남겨두자"며 추격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식량 수집 계획은 실패했으나 전군이 궤멸당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루스피나로 돌아와 진영을 요새화하고 병력을 재정비했다.
얼마 후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현장에 도착하여 라비에누스, 페트레이우스와 연합했으나 카이사르 진영의 방어가 완고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추가 병력이 카이사르에게 꾸준히 합류하자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철군했다. 이후 누미디아 왕 유바 1세가 합세하고 카이사르도 제9군단과 제10군단을 맞이했으나, 양측은 전력이 완비될 때까지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포위하였고, 이는 탑수스 전투로 이어져 카이사르의 결정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주요 사료
이 전투에 대한 주요 사료는 익명의 저자가 기록한 《아프리카 전쟁기》(Bellum Africum)로, 카이사르의 《내전기》를 보충하는 자료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