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초기
로베르트 라이는 1890년 2월 15일 프로이센 라인란트 지방 니렌호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스터, 예나, 본, 뮌헨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포병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공군으로 전과하여 조종사로 복무했다. 1917년 프랑스 상공에서 격추되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언어장애와 뇌 손상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후에는 화학 산업 분야에서 일했다.
나치당에서의 활동
1925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그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은 후 나치당에 가입했다(당원 번호 27,094번). 그는 빠르게 당내에서 입지를 다졌고, 1928년에는 쾰른-아헨 지구의 관구 지도자(가울라이터)로 임명되었다. 1930년에는 독일 국회인 국가의회(Reichstag)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나치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당내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독일 노동 전선(DAF) 총재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히틀러는 1933년 5월 2일 독일의 모든 자유 노동조합을 해체하도록 명령했다. 로베르트 라이는 이 해체된 노동조합 자산을 몰수하고 그 자리에 나치당의 통제를 받는 새로운 노동 조직인 독일 노동 전선(DAF)을 설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라이는 DAF의 총재로서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임금, 사회 복지, 심지어 여가 활동까지 국가가 통제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DAF 산하에 "힘을 통한 기쁨(Kraft durch Freude, KdF)" 프로그램을 창설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휴가, 여행, 스포츠, 문화 활동 등을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나치 이념을 주입하고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는 DAF를 통해 독일의 모든 노동력을 나치 정권의 목표에 종속시키려 노력했으며, 유대인과 비(非)아리아인의 고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이자 폭음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DAF 내에서의 부패와 독단적인 행위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후와 최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로베르트 라이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인 1945년 10월 25일, 그는 수감 중이던 뉘른베르크 감옥에서 변기 막대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