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는 955년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벌어진 일련의 군사 교전으로, 독일 왕국(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이끄는 군대가 오늘날 헝가리인의 조상인 마자르(헝가리) 군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전투는 오늘날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 남쪽, 도나우강의 지류인 레히강(Lech) 유역의 범람원인 레히펠트(Lechfeld) 평원에서 벌어졌다. 헝가리 역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제2차 아우크스부르크 전투'라고도 부르며, 같은 지역에서 45년 전에 벌어진 첫 번째 레히펠트 전투와 구별된다.
배경
10세기 전반,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마자르인들은 기마 궁술을 앞세워 서유럽 각지를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침략·약탈해 왔다. 954년에는 오토 1세의 아들 리우돌프와 사위 콘라트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독일 왕국 내부가 혼란에 빠졌고, 반란 세력은 마자르인을 불러들여 라인란트와 프랑스 일대를 약탈하게 했다. 955년 초 오토 1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내부 질서를 회복한 상태였다.
955년 6월 말에서 7월 초, 마자르군은 약 8,000~10,000명의 기마 궁수, 보병, 공성 기구를 이끌고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하여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이들은 독일 주력군을 야전으로 유인해 격멸하려는 의도를 지녔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주교 울리히가 방어를 맡았고, 오토 1세는 8개 군단으로 편성된 약 7,000~9,000명의 중기병·보병을 이끌고 도시 구원에 나섰다.
전투 경과
8월 10일, 오토 1세의 군대가 아우크스부르크에 접근하던 중 마자르군의 기습으로 보헤미아 후위 군단이 괴멸당하고 슈바벤 군단 일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마자르군이 독일군의 보급 부대를 약탈하는 데 몰두한 사이, 로렌 공작 콘라트가 중기병을 이끌고 반격하여 마자르군을 격퇴했다. 이후 오토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길을 막은 마자르 주력군과 정면 교전을 벌였고, 중무장한 독일 중기병은 근접전에서 경무장한 마자르군을 물리쳤다. 마자르군은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했으나, 오토 1세는 추격을 자제하고 밤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냈다.
8월 11일과 12일, 오토 1세는 동부 바이에른의 모든 도강 지점을 장악하도록 명령하여 마자르군의 귀환로를 차단했다. 이때 폭우와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 퇴각하던 마자르군의 이동이 크게 지체되었고, 독일군과 지역 방어 병력이 이를 추격·섬멸하면서 마자르군의 패배는 전멸에 가까운 재앙으로 이어졌다. 마자르군 지도자 불추, 렐, 수르 등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독일 측에서는 콘라트 공작이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결과와 의의
이 승리로 독일 왕국은 보존되었고, 마자르인의 서유럽 침략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오토 1세는 승리 후 군대에 의해 '조국의 아버지'이자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강화된 지위를 바탕으로 962년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중세 초기 유목민 경기병 위주의 전쟁 방식이 끝나고, 중세 성기 기사 중기병 중심의 전쟁 방식으로 전환되는 상징적 분기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마자르 측에서는 이 패배 이후 서방 원정을 완전히 중단하고 정주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헝가리 왕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료
가장 중요한 사료로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울리히가 의뢰한 전투 기록과, 코르바이의 연대기 작가 비두킨트(Widukind of Corvey)가 저술한 《작센인의 사적(事蹟)》이 꼽힌다. 다만 비두킨트의 기록은 전투의 핵심 과정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간략하여, 전투의 세부 진행 양상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일부 추론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