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다닐로비치 쿠치마(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1938년 8월 9일 ~ )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인으로, 1994년 7월 19일부터 2005년 1월 23일까지 우크라이나의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역사상 유일하게 두 차례 대통령 임기를 수행한 인물이다.
생애 초기 및 배경
쿠치마는 1938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 체르니히우주의 차이키네 마을에서 농민 가정의 셋째 자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닐로 쿠치마는 공산당원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징집되어 1944년 전사했다. 쿠치마는 독일 점령기를 겪었고, 전후 극심한 빈곤 속에서 성장했다.
1960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국립대학교(현 올레스 혼차르 드니프로 국립대학교)에서 공학물리학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 위치한 피우덴네 설계국에서 미사일 및 우주 발사체 설계에 참여했으며, R-36 미사일 설계에 기여하여 레닌상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주요 대륙간탄도미사일 제조업체인 피우덴마시의 총책임자로 취임했다.
정치 경력
1990년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의회)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92년 10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우크라이나의 제2대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경제 위기 속에서 카르보바네츠를 도입하고 시장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 상황 개선에는 실패했다.
1994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쿠치마는 동부 및 남부 공업 지역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경제 회복과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첫 번째 임기(1994~1999) 동안 쿠치마는 시장 개혁을 추진했다. 1994년 10월 의회 연설에서 보조금 축소, 가격 통제 철폐, 세금 인하, 산업 및 농업 민영화 등을 포함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선언했다. 1996년 9월에는 우크라이나의 새 국가 통화인 흐리우냐를 도입하여 경제 안정에 기여했다. 같은 해 6월 28일 우크라이나 새 헌법이 채택되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대외 정책에서는 러시아와의 우호·협력·동반자 조약에 서명했으나, 동시에 NATO의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 프로그램에 가입하고 NATO와의 특별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는 등 다중 벡터 외교를 추구했다.
두 번째 임기(1999~2005)는 여러 논란으로 점철되었다. 2000년 언론인 헤오르히 곤가제가 실종되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쿠치마의 경호원 미콜라 멜니첸코가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카세트 스캔들)가 공개되면서 쿠치마가 곤가제 살해 및 불법 무기 거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쿠치마는 이를 지속적으로 부인했으며, 2011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증거 부족으로 그에 대한 기소를 기각했다.
재임 기간 동안 부패와 언론 탄압이 심화되었고,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영향력이 크게 성장했다.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쿠치마는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했으나, 선거 부정 의혹으로 촉발된 오렌지 혁명이 발생했다. 쿠치마는 비상사태 선포 요구를 거부하고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결국 빅토르 유셴코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퇴임했다.
퇴임 이후
퇴임 후에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2014년 돈바스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대표하여 민스크 협상(민스크 II)에 참여했으며,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돈바스 분쟁 관련 삼자 접촉 그룹의 우크라이나 특별 대표를 역임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는 키이우에 남아 국가 방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평가
쿠치마의 유산은 논쟁적이다. 경제 안정화와 시장 개혁을 추진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나, 부패 만연, 언론 탄압,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올리가르히 체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여러 소식통은 그의 통치 방식을 권위주의적이라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