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출생과 가계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Vinci)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부 안토니오가 공증인으로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출생 시각은 토요일 새벽 3시로 전해진다.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빈치 출신'이라는 뜻의 출신지 표시이며, 레오나르도 본인에게는 현대적 의미의 성씨가 없었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 1426~1504)는 법률가를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의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테리나 디 메오 리피(Caterina di Meo Lippi, 약 1434~1494)는 하층 계급 출신의 여성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들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23세로 미혼이었으나, 모친의 사회적 신분이 낮고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출생 직후 레오나르도는 생모와 함께 생활하였으나, 아버지가 결혼한 계모 알비에라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본가로 들어가 조부모와 숙부 프란체스코의 양육 아래 성장하였다. 1457년경의 과세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부친과 한 집에 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아버지 피에로는 이후 여러 차례 재혼하여, 레오나르도에게는 총 12명의 이복형제가 생겼다. 그러나 서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복형제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며, 1504년 아버지 사망 시 이복형제들은 레오나르도에게 유산을 분배하지 않았다. 훗날 숙부 프란체스코 사후에도 상속 문제로 이복형제들과 민사소송을 벌이기도 하였다.
교육과 도제 시절 (1466~1482)
사생아라는 신분으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외자에게 대학 진학이나 의사·법률가·공증인 등 전문직 진출이 제한되었다. 그는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공식적으로 배웠을 뿐,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 당대 지식인들의 언어를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후 40대에 이르러 라틴어를 독학으로 익혔으며, 그 연습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1466년, 14세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하여 당대 피렌체에서 가장 저명한 공방을 운영하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회화, 조각, 기초 공학 및 기술 공작 등 르네상스 공방의 전통적인 도제 교육을 받았다. 1472년에는 수업을 마치고 피렌체 화가 조합(성 루가 길드)에 정식 등록하여 독립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1476년경,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좌측 하단의 천사를 그렸는데, 이는 스승의 솜씨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여준 사례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1466년부터 1482년까지는 흔히 제1의 피렌체 시대로 분류되며, 이 시기에 《수태고지》, 《석죽의 성모》,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이미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1의 밀라노 시대 (1482~1499)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실질적 통치자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의 초청을 받아 밀라노로 이주하였다. 그가 밀라노로 향한 직접적 계기는 스포르차 가문의 선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 제작과 궁정 음악가로서의 활동이었다. 약 17년간 지속된 제1의 밀라노 시대 동안 레오나르도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군사 기술자, 무대 디자이너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그의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암굴의 성모》(1483년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와 《최후의 만찬》(1495~1498,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 식당)이 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처음으로 선보였으며, 이 기법은 훗날 《모나리자》에서 절정에 이른다. 스푸마토는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리며,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대기까지 묘사함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적 공간감을 구현하는 화법이다.
또한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였고, 조류의 비행, 광학, 유체역학 등에 관한 연구를 병행하며 방대한 노트를 남겼다.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공으로 스포르차 가문이 몰락하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왔다.
제2의 피렌체 시대 (1500~1506)
1500년 피렌체로 귀환한 레오나르도는 제2의 피렌체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성 안나와 성 모자》의 제단화를 구상하고, 1502년에는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의 초청으로 군사 기술자 및 토목 기사로서 운하 개발과 도시 계획에 참여하였다. 1503년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는 과학 연구가 한층 심화되어, 새의 비행 원리, 지질학, 물의 운동, 인체 해부 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제2의 밀라노 시대 (1506~1513)
1506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다시 밀라노로 향하였다. 제2의 밀라노 시대로 분류되는 이 시기(1506~1513) 동안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총독 샤를 당부아즈의 후원 아래 해부학 연구를 지속하고 건축 및 공학 프로젝트에 관여하였다. 이 무렵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zi)를 만나 평생의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로마 시대 (1513~1516)
1513년 10월,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의 후원을 받아 로마로 이주하였다. 당시 줄리아노의 형 조반니 데 메디치는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상태였다. 레오나르도는 바티칸 내 벨베데레 궁정에 거처를 마련하고 연구를 지속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교황청 내에서의 입지는 좁아졌다. 1515년경에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고자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프랑스 앙부아즈 시대와 죽음 (1516~1519)
1515년 12월, 볼로냐에서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I)는 이 자리에서 레오나르도를 만나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교황과의 관계도 소원해지자,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 결정하였다.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 인근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고, '왕의 수석 화가이자 기술자 겸 건축가'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 시기 레오나르도는 중풍으로 오른팔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으나, 왼손잡이였기에 작업에 큰 지장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모나리자》와 《성 안나와 성 모자》를 완성하였고, 로모랑탱(Romorantin)에 새로운 왕궁과 수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예감한 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유언장에는 프랑스에 묻히길 원한다는 내용,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살라이(Salaì)와 하인 바티스타에게 반씩 분할 상속한다는 내용, 그리고 소장 중인 그림과 노트들을 제자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1519년 5월 2일, 67세의 나이로 클로 뤼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프랑수아 1세는 생제르맹앙레에 머물고 있었으며, 임종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앙부아즈 성 내 생 플로랑탱 교회에 안장되었으나, 프랑스 혁명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고 묘지가 훼손되면서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방대한 노트와 드로잉, 회화 작품들은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가 상속하여 보존하였고, 1570년 멜치 사후에 이르러서야 그 전모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