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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몬 나비예프

라흐몬 나비예프(타지크어: Раҳмон Набиев, 러시아어: Рахмон Набиевич Набиев, 1930년 10월 5일 ~ 1993년 4월 11일)는 타지키스탄의 정치인으로, 타지키스탄의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소련 시절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고위 관료로 활동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타지키스탄의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생애 초기

나비예프는 1930년 10월 5일 소련 타지크 SSR 레니나바드주(현재의 수그드주) 후잔트 지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6세였던 1946년부터 콜호즈에서 회계사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레니나바드 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했다. 이후 타슈켄트의 관개·농업기계화 공학자 연구소에서 수학한 뒤 1954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이스피소르의 기계 트랙터 기지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2년간 근무했다.

정치 경력

1961년 타지크 SSR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타지크 SSR 농업부 장관을 지냈고, 1973년에는 각료회의 의장(정부 수반)이 되었다. 1982년에는 타지크 SSR 공산당 제1서기가 되어 공화국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5년 부패 스캔들과 관련된 논란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타지크 SSR 자연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대통령 재임

1991년 9월 23일, 소련 해체 과정에서 타지키스탄 최고 소비에트 의장이 되어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정치적 압력으로 13일 만인 10월 6일에 사임했다. 이후 1991년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60.4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12월 2일에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다만 야권에서는 선거 부정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나비예프는 1991년 12월 알마아타에서 다른 옛 소련 공화국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국가연합(CIS) 설립에 관한 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했다. 또한 1992년 5월 타슈켄트에서 집단안보조약(CST)에 서명했다. 그는 친러시아·친우즈베키스탄 성향으로 평가되었으며,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등의 지지를 받았다.

내전과 사임

나비예프의 재임 기간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철되었다. 1992년 3월 그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이는 타지키스탄 혁명으로 이어졌다. 시위가 진압되면서 5월 5일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1992년 9월 7일, 나비예프는 두샨베 공항으로 향하던 중 반대파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고, 총구 앞에서 사임을 강요받았다. 그의 사임은 11월 19일 타지키스탄 최고 소비에트 제16차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수리되었으며, 이후 에모말리 라흐몬이 권력을 장악했다.

사망

나비예프는 1993년 4월 11일 후잔트에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으나,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살해 또는 자살설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가족은 심장 질환이 없었다며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망 후 후잔트에서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타지키스탄 전역의 거리, 학교 및 일부 공공시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평가

나비예프는 타지키스탄 역사에서 소련 시절과 독립 초기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타지키스탄 최초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었으나, 그의 재임 기간 중 발생한 내전으로 최대 15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유산은 종종 후임 대통령인 에모말리 라흐몬에 의해 가려지곤 하지만, 타지키스탄 초기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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