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구스타프 발렌베리(Raoul Gustaf Wallenberg, 1912년 8월 4일 ~ 1945년 1월 17일 실종, 1947년 사망 추정)는 스웨덴의 건축가, 사업가, 외교관이자 인도주의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헝가리 부다페스트 주재 스웨덴 대사관 특사로 근무하면서 홀로코스트 당시 다수의 유대인을 구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초기
발렌베리는 1912년 8월 4일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 리딩외(Lidingö)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라울 오스카 발렌베리는 스웨덴 해군 장교였으나 발렌베리가 태어나기 3개월 전 암으로 사망했다. 외할아버지 페르 요한 비싱은 스웨덴의 저명한 의사였다.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의 유력한 금융·산업 자본가 가문으로, 그의 친할아버지 구스타프 발렌베리는 외교관으로 도쿄, 이스탄불, 소피아 등지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발렌베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스웨덴 군에서 8개월간 복무했으며, 이후 파리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931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여 1935년 졸업했다. 미국 체류 시절에는 히치하이킹을 즐기며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16분의 1 유대인 혈통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자랑스러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졸업 후 스웨덴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 학위가 스웨덴에서 건축가 자격으로 인정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건축 자재 회사에 근무했고, 이후 팔레스타인 하이파의 네덜란드 은행 지점에서 일하며 나치 독일에서 피난 온 유대인 난민들과 교류했다. 1936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그는 헝가리계 유대인 사업가 칼만 라우어가 운영하는 중앙유럽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부다페스트 구출 활동
1938년부터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모델로 한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을 제정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출신인 라우어가 헝가리를 방문하기 어려워지자, 발렌베리가 그의 대리인으로 헝가리를 오가며 사업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는 헝가리어를 배우고 1941년부터 부다페스트를 자주 방문했다.
1944년 3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헝가리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추방이 시작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지휘 아래 하루 최대 12,000명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전쟁난민위원회(War Refugee Board)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구출 작전을 이끌 인물을 물색했고, 발렌베리가 그 임무에 선발되었다. 1944년 6월, 미국 재무부 관료이자 전략사무국(OSS) 요원이었던 이버 C. 올슨이 발렌베리를 소개받았고, 스웨덴 외무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발렌베리를 부다페스트 주재 대사관에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발렌베리는 1944년 7월 9일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그는 스웨덴 국민으로서 본국 송환을 기다리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보호여권'(Schutzpass)을 발급하여 유대인들의 추방을 막았다. 이 문서는 법적 효력이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보이는 외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독일 및 헝가리 당국이 이를 수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부다페스트에 32개 건물을 임대하여 이를 스웨덴 영토로 선언하고 외교적 면책 특권을 주장하며 약 10,000명을 수용했다.
발렌베리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타 보호여권을 나눠주는 등 직접적인 구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운전사였던 샨도르 아르다이의 증언에 따르면, 발렌베리는 독일군의 사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차 지붕에 올라가 보호여권을 전달했으며, 이를 받은 사람들은 스웨덴 국기로 표시된 차량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부다페스트 포위전이 진행되던 1945년 1월 17일, 발렌베리는 소련군 사령부로 소환되었다. 그의 마지막 기록된 말은 "말리놉스키 원수에게 가는 중이다. 손님으로 갈지 포로로 갈지 아직 모르겠다"였다.
실종과 사망 논란
발렌베리는 1945년 1월 17일 소련 SMERSH(군사첩보기관) 요원들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된 후 실종되었다. 그는 데브레첸에서 기차로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루뱐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57년, 소련 당국은 그가 1947년 7월 17일 루뱐카 교도소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논란이 계속되었다.
1991년 러시아 정부의 조사에서 발렌베리가 1947년 루뱐카 교도소에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 검찰이 발렌베리와 그의 운전사를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로 사후 복권했다. 2016년에는 KGB 수장 이반 세로프의 일기가 발견되어 "발렌베리가 1947년에 제거된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기록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수감자들은 발렌베리가 1947년 이후에도 소련 교도소나 정신병원에서 목격되었다고 주장했으며, 1980년대까지의 목격담도 존재한다.
2016년 10월, 스웨덴 국세청은 발렌베리를 법적으로 사망 처리했으며, 사망일은 1952년 7월 31일로 기록되었다.
정보기관 연루 의혹
1996년 미국 CIA가 기밀 해제한 문서에 따르면, 발렌베리는 부다페스트 체류 당시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정보 자산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44년 11월 OSS의 통신문에는 발렌베리가 헝가리 독립운동(MFM)과 OSS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소련이 그를 체포한 동기가 그의 서방 정보기관 연루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구출 인원에 대한 논쟁
발렌베리가 구출한 유대인의 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 일부에서는 10만 명이라는 수치를 주장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과장된 것으로 평가한다.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Yad Vashem)은 보호여권을 발급받은 인원을 약 4,500명으로 추산한다. 헝가리계 미국인 역사학자 랜돌프 L. 브라함은 발렌베리가 약 7,000~9,000명의 유대인을 구출했다고 분석했다.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는 발렌베리가 구출한 인원을 4,500명으로 보면서도, 다른 중립국 외교관들이 더 많은 유대인을 구했지만 발렌베리는 나치와 화살십자당에 직접 맞서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유산과 기념
발렌베리는 1963년 야드 바셈으로부터 '국제의로운 사람'(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지정되었다. 1981년 미국 의회는 그를 미국 명예시민으로 추대했는데, 이는 윈스턴 처칠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후 캐나다, 헝가리, 호주, 영국, 이스라엘에서도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에는 미국 의회로부터 의회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스웨덴 룬드 대학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권·인도법 연구소(Raoul Wallenberg Institute)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발렌베리의 생애와 실종은 여러 영화, 오페라,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었다. 1985년 TV 영화 《Wallenberg: A Hero's Story》, 1990년 스웨덴 영화 《Good Evening, Mr. Wallenberg》 등이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