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 바시(Laura Bassi, 본명: 라우라 마리아 카테리나 바시, Laura Maria Caterina Bassi, 1711년 10월 ~ 1778년 2월 20일)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유럽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직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며, 여성으로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로 기록된다.
생애
라우라 바시는 1711년 10월 교황령 볼로냐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주세페 바시(Giuseppe Bassi)와 어머니 로사 마리아 체사리(Rosa Maria Cesari)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문헌에 따라 10월 20일에서 29일 사이로 차이가 있다. 집안은 중산층에 속하였으며, 바시는 사촌이자 로마 가톨릭 사제인 로렌초 스테가니(Lorenzo Stegani)로부터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한 기초 학문을 배웠다. 이후 가정의 주치의이자 해부학 교수였던 가에타노 타코니(Gaetano Tacconi)에게 7년간 개인 교습을 받으며 철학과 과학을 익혔다.
1731년, 바시는 훗날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되는 추기경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Prospero Lambertini)를 만났고, 그의 후원으로 학계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1732년은 바시에게 획기적인 해였다. 같은 해 3월 볼로냐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고, 4월에는 49개의 논제를 공개 토론한 끝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는 1678년 엘레나 코르나로 피스코피아(Elena Cornaro Piscopia)에 이어 여성에게 수여된 두 번째 박사 학위였다. 5월에는 추가로 12개의 논제를 발표하여 대학 강의 자격을 얻었고, 10월에는 자연철학 명예 교수직을, 12월에는 아르키지나시오(Archiginnasio)에서 첫 공개 강의를 열었다.
1738년 2월 7일, 바시는 의사이자 철학 박사이며 볼로냐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주세페 베라티(Giuseppe Veratti)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학문적 관심사를 공유하며 함께 연구를 수행하였다.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다섯 명에 불과하였다.
바시는 1778년 2월 20일, 67세의 나이로 볼로냐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볼로냐의 코르푸스 도미니(Corpus Domini) 성당에 안장되었으며, 10년 후 그녀를 존경했던 생리학자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도 같은 곳에 묻혔다.
학문적 경력 및 업적
바시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대학은 여성의 공개 강의를 제한적으로만 허용하였다. 그녀의 첫 강의 주제는 "우주 만물의 근원 원소인 물"(De aqua corpore naturali elemento aliorum corporum parte universi)이었다. 그러나 정규 강의가 아닌 특별 행사에만 강단에 설 수 있었고, 연간 500리레의 명예 수당만을 받았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바시는 학문 활동을 지속하였다. 1749년부터는 볼로냐에 있는 자신의 집에 사설 실험실과 강의실을 마련하여 개인 교습과 실험을 진행하였다. 바시-베라티 연구실은 라차로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 알레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 장앙투안 놀레(Jean-Antoine Nollet) 등 당대 저명한 과학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바시의 주요 학문적 관심은 뉴턴 물리학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자연철학계에 아이작 뉴턴의 사상을 소개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760년대에는 남편 베라티와 함께 전자기학 실험을 수행하였으며, 이는 볼로냐 대학의 다른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물리학의 여러 분야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으며, 뉴턴 물리학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자기학을 강의하고자 하였으나 대학 당국이 이를 정규 과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745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볼로냐 과학 연구소(Istituto delle Scienze)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베네딕토 아카데미(Accademia Benedettina)를 설립하자, 바시는 이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정회원이 아닌 추가 회원 자격이었다.
1776년, 65세의 나이로 바시는 마침내 볼로냐 과학 연구소의 실험물리학 석좌 교수로 정식 임명되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오랜 차별을 딛고 이룬 성취였으나,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바시는 교수 재직 기간 동안 물리학과 수리학에 관한 28편의 논문을 집필하였으나, 그중 출판된 것은 4편에 불과하다. 그녀는 단행본을 출판하지는 않았으며, 공저자를 포함하여 총 31건의 학술 논문을 남겼다.
평가 및 의의
라우라 바시는 18세기 유럽에서 여성의 고등 교육과 학문적 경력이 극도로 제한되던 시대에, 뛰어난 지적 능력과 끈기로 학계의 벽을 허문 선구자였다. 볼로냐 대학교는 바시를 도시의 진보적 이미지를 홍보하는 상징적 인물로 활용하였으나, 동시에 그녀의 공식적 활동을 제한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바시는 사설 연구실을 통한 독자적 학문 활동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이탈리아에 뉴턴 물리학을 정착시키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였다. 오늘날 그녀는 과학사에서 여성 학문 참여의 중요한 선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