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데 알마그로 (스페인어: Diego de Almagro, 1475년경 ~ 1538년 7월 8일)는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이자 탐험가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함께 잉카 제국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초로 대규모 칠레 탐험을 이끈 인물이다. 그의 탐험은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생애 초기 및 신대륙 도착 알마그로는 1475년경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알마그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사생아로 기록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514년, 그는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의 원정대에 참여하여 신대륙으로 건너왔으며, 파나마에 정착하여 다른 콩키스타도르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장한 원정대에 참여하며 부를 축적했고, 경험을 쌓았다.
페루 정복 참여 1524년, 알마그로는 프란시스코 피사로, 에르난도 데 루케 신부와 함께 "레반테의 동업자들(Compañía del Levante)"이라는 삼자 동맹을 결성하여 남방 탐험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이들은 금과 은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미지의 땅(잉카 제국)을 탐험하고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기 탐험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끈질기게 탐험을 계속했다.
1532년, 피사로가 잉카 황제 아타왈파를 생포하고 카하마르카 대학살을 일으킬 당시, 알마그로는 병력과 보급품을 이끌고 뒤늦게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그의 도착은 피사로의 병력에 큰 힘이 되었고, 잉카 제국의 최종적인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마그로는 잉카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정복하는 데도 기여했다.
칠레 원정 (1535년 ~ 1537년) 페루 정복 이후, 알마그로와 피사로 사이에는 전리품과 권력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잉카 제국의 심장이었던 쿠스코의 소유권 문제를 두고 대립이 격화되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알마그로에게 피사로가 정복한 영토의 남쪽 지역인 "누에바 톨레도"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알마그로는 새로운 부를 찾아 1535년 대규모 칠레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약 500명의 스페인 병사와 수천 명의 원주민 보조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향했다. 이 여정은 혹독한 추위와 험난한 지형, 식량 부족으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알마그로는 칠레 중부에 도달하여 탐사를 진행했으나, 페루에서 기대했던 황금이나 풍요로운 문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저항도 심했다. 실망한 알마그로는 1537년, 태평양 연안의 사막 길을 통해 페루로 돌아왔다.
피사로와의 갈등 및 죽음 칠레 원정에서 돌아온 알마그로는 페루에서 피사로 세력과 쿠스코 소유권을 두고 다시 충돌했다. 알마그로는 쿠스코를 점령하고 피사로의 동생인 에르난도 피사로와 곤살로 피사로를 투옥했다. 이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1538년 4월 26일, 알마그로의 군대는 쿠스코 남쪽의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tle of Las Salinas)에서 에르난도 피사로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했다. 알마그로는 도주했으나 곧 체포되었고, 1538년 7월 8일 쿠스코에서 에르난도 피사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페루에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 간의 내전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산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잉카 제국 정복의 주역 중 한 명이자 칠레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칠레 원정은 비록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후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칠레 정복에 필요한 지리적 정보와 경험을 제공했으며, 칠레 식민지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 알마그로의 죽음은 스페인 식민 당국이 페루의 질서를 확립하고 총독령을 설치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