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수의 난(杜文秀起義, Panthay Rebellion)은 1856년부터 1873년까지 중국 청나라 말기 윈난성(雲南省)에서 무슬림 후이족(回族)과 기타 소수민족이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의 지도자 두문수(杜文秀, 1823년~1872년)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배경
19세기 중반 윈난성에서는 한족과 후이족 사이의 오랜 민족적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1845년에는 한족과 청나라 관리들에 의한 후이족 학살 사건도 발생한 바 있다. 1856년, 쿤밍(昆明)에서 반란 진압을 책임진 만주족 관리 슈싱아(Shuxing'a)가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품고 반무슬림 학살을 조직하면서 성 전체에 걸친 다민족 반란이 촉발되었다.
두문수는 윈난성 영창부(永昌府) 보산(保山) 출신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윈난성 서부 대리(大理)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독립 왕국을 건설하고 반란을 주도하였다.
반란의 전개
두문수는 1856년 대리를 장악하여 청나라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를 마련하였다. 반군은 스스로를 핑난 왕국(平南國, '남쪽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왕국')이라고 칭하였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두문수의 정권을 '술탄국'으로도 표현한다. 두문수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과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으며, "한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라, 청나라 조정은 타도하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두문수의 군대에는 후이족 무슬림뿐 아니라 한족, 리족(彝族), 바이족(白族), 하니족(哈尼族) 등 다양한 비무슬림 민족이 합류하였다. 핑난 왕국의 군사 직위의 3분의 1은 한족이 차지했고, 한족은 민정 직위의 대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반군은 태평천국의 난과의 연대를 약속하기도 하였다.
1860년부터 1868년까지가 핑난 왕국의 전성기로, 이 기간 동안 반군은 40개의 도시와 100개의 마을을 점령하거나 파괴하였다. 청나라가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윈난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한편 윈난성 동부를 기반으로 한 또 다른 회족 반란 지도자 마여룡(馬如龍)은 청나라에 항복하여 반군 진압에 협력했다.
쇠퇴와 종결
1868년 이후 핑난 왕국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나서 포위망을 강화하고 프랑스 포병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아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두문수는 영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국은 베이징 정부에 대항하여 개입하기를 거부하였다.
1872년 두문수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아편이 완전히 효과를 발휘하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1873년 1월 대리가 청군에게 함락되었고, 같은 해 5월 모미엔(모미엔)이 함락되면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반란으로 인해 윈난성에서 최대 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파
반란 진압 후 많은 후이족 난민들이 버마, 태국, 라오스 등 국경 너머로 탈출하여 소수 중국 후이족 인구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버마에서는 반란 참가 후이족을 '판타이(Panthay)'라고 불렀는데, 이는 버마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샨어 'Pang hse'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란은 꼰바웅 왕조 시기 버마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버마는 중국의 요구에 따라 핑난 왕국 반군과의 무역을 거부해야 했고, 중국에서 쌀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인도에서 쌀을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두문수는 오늘날 중국 정부로부터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타리크 알리의 소설 『황금 나비의 밤』 등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반란이 순수한 종교적 성격을 띠었는지, 아니면 주로 민족적·계급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