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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지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 유적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동래읍성지의 연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 따르면 1021년(고려 현종 12년)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387년(우왕 13년)에 원수 박위(朴葳)가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군성의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 둘레 3,090척, 높이 13척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446년(세종 28) 현령 김시로가 둘레 3,092척, 높이 15척으로 석축하였다는 기록이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전한다.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정3품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 역할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비롯한 군·관·민이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인 최대 격전지였으며, 이 전투로 인해 성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고 방치되었다가,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부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규모와 구조

1731년 증축된 후기 동래읍성의 규모는 성곽 둘레 약 3.8km(17,291척), 높이 17척에 달하였다. 성은 충렬사 뒷산(망월산 일대)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서장대)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의 평탄지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다.

성문으로는 동문(지희루), 서문(심성루), 남문(무우루), 북문, 인생문, 암문(은일루) 등 6개가 있었다. 남문에는 좌우로 성벽을 뻗친 익성(翼城)이 설치되었고, 나머지 문에는 옹성(甕城)이 설치되었다. 성 내부에는 동헌, 객사, 누정, 향청, 무청, 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동·서·북장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발굴과 복원

1979년 서장대와 동장대를 중심으로 한 복원 작업이 시작된 이후, 2022년까지 20차례 이상의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조선 전기 읍성지의 성벽, 해자(성 주변의 도랑), 성내 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후기 읍성지의 성벽, 치성(雉城), 수구, 목교 등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으로 평지에 해당하는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주로 북쪽 산지 일대에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현재 북문, 인생문, 북장대, 동장대, 서장대와 성벽 약 930m, 치성 7개소 등이 복원되어 있다.

의의

동래읍성지는 조선 전기 연해읍성의 축조 방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17세기 이후 도입된 새로운 성곽 축조 경향을 반영한 지역 거점 성곽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으로서,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인골, 갑옷, 투구, 도검류, 화살촉 등의 유물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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