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東京)은 고려시대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명이다. 동경은 옛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金城) 또는 서라벌이 고려 시대에 개칭된 명칭이다.
연혁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 왕건은 신라 지역을 경주사(慶州司)라 칭하고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司)의 본영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에는 경주의 위상을 높여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다.
987년(성종 6) 동경이라 개칭하고 이곳에 유수(留守)를 설치하면서, 수도인 개경(開京)과 평양의 서경(西京)을 합쳐 고려의 삼경 체제가 정비되었다. 같은 해 전국을 10도(十道)로 나눌 때 동경은 금주(金州)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소속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유수사(留守使)를 비롯한 여러 관리가 파견되어 정비된 관제가 갖추어졌다.
1012년(현종 3)에는 유수관을 폐지하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지위가 낮추어졌다. 1014년(현종 5)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 개칭되었고, 1030년(현종 21)에 다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복구되어 계수관 체제의 동경유수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숙종 대에 남경(南京)이 신설되면서 동경의 격은 다시 낮추어졌으며, 예종 대에는 유수관의 지위를 일시 회복하기도 하였다.
1202년(신종 5) 동경 야별초(夜別抄)의 반란이 일어나 토벌되었고, 1204년(신종 7)에는 동경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내세운 반란이 다시 일어나자 동경을 경주로 격하시키고 속현들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이후 1219년(고종 6)에 다시 동경유수로 복구되었다.
몽골 간섭기 관제 개편으로 1304년(충렬왕 30)에는 계림부(鷄林府)로 개칭되었다. 공민왕 대에 관제가 복구되면서 잠시 경주로 회복되었고, 조선 태종 대부터 경주라는 이름이 다시 사용되었다.
역사적 의미
동경은 고려 초·중기에 개경과 서경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신라 구세력의 포용과 후삼국 통일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상징적 의미에서 옛 신라 수도 경주에 경의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다른 경에 비해 국왕 순행(巡幸)의 부수도로서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경주는 동도(東都), 배읍(陪邑), 하도(下都)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와 같은 문인들은 개경·서경에 대비되는 동도로 인식하였다. 반면 원간섭기에는 이제현(李齊賢) 등이 경주의 위상을 경상도의 거읍 정도로 낮추어 인식하였다.
동경으로 불린 기간 중에는 동경잡기(東京雜記)와 같은 지리지가 편찬되기도 하였고, 동경민란 등 동경을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이 여러 차례 발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경」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