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일본의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기한 문화 이론적 개념으로, 이야기(narrative)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구성 요소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콘텐츠 수용 방식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2001년 저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되었으며, 영어권에서는 'database consumption'으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도 논의되고 있다.
배경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의 직접적인 이론적 선행은 평론가이자 작가인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의 이야기 소비(物語消費) 개념이다. 오쓰카는 1989년 저서 《이야기 소비론》에서 빅쿠리맨 스티커나 실바니아 패밀리와 같은 상품이 상품 그 자체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배후에 있는 '커다란 이야기'(세계관이나 설정)가 소비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1980년대에 두드러진 소비 형태였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커다란 이야기' 개념을 확장·수정하여,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커다란 비(非)이야기', 즉 정보의 집적으로서의 '데이터베이스'로 대체된다고 주장했다. 즉 소비자들은 더 이상 통일된 서사나 세계관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권 내에서 공유되는 방대한 요소·기호의 집합체인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소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주요 내용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분석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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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바게리온》(1995) 이후의 팬덤 문화는 기존의 《기동전사 건담》 팬덤과 대비된다. 건담 팬들이 작품 배후의 가공된 역사(우주 세기 등)를 정사하는 '이야기 소비' 양식을 보인 반면, 에바게리온 팬들은 세계관에 몰입하기보다 캐릭터나 메카닉 등의 요소를 소재로 2차 창작(동인지, 피규어 등)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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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캐럿(1998), 하츠네 미쿠(2007) 등은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갖지 않고 먼저 캐릭터가 등장한 뒤, '모에 요소'의 조합으로 수용되고 이후 미디어 믹스와 2차 창작이 전개된 사례로 거론된다. 특히 하츠네 미쿠는 아즈마 히로키 본인이 '데이터베이스 소비 그 자체'라고 언급한 대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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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문화 외에서도 힙합·테크노 음악의 샘플링과 리믹스, iPod를 통한 개별 곡 재편집, 블로그의 비계층적 구조, 셀렉트 숍의 브랜드 초월 진열 등이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사례로 논의되기도 한다.
이론적 배경과 관련 개념
이 개념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과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커다란 이야기의 해체' 논의에 이론적 뿌리를 둔다. 아즈마 히로키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용어(현실계·상징계·상상계)를 원용하여 '데이터베이스'를 현실계에 대응시키기도 했으나, 정신과 의사 사이토 다마키(斎藤環)는 데이터베이스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상징계이며, 자율성을 갖춘 상징계가 캐릭터의 생성을 유도한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쿠레사와 타케미(暮沢剛巳)는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가 이른바 '모에 요소'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정보의 집합이므로, 정보공학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개념에 대응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판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경제학자 타나카 히데토미(田中秀臣)는 이야기 소비·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변천이 국제 정세가 아니라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 불황이라는 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평론가 구리하라 유이치로(栗原裕一郎)도 '커다란 이야기의 실효' 현상이 결국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야다이 신지(宮台真司)와 카가미 히로유키(鏡裕之)는 2000년대 후반의 휴대전화 소설 붐이 데이터베이스 소비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우노 쓰네히로(宇野常寛)는 이에 대해 휴대전화 소설이 플롯을 비대화함으로써 '커다란 이야기'의 상실을 보완한 것으로 해석하는 등, 개념의 적용 범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의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은 일본의 오타쿠 문화와 포스트모던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학술적·비평적 프레임워크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문화콘텐츠 소비 연구에도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