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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묘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위치한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宣祖)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 1530~1559)와 생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1567)의 쌍분(雙墳)이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역사적 배경

덕흥대원군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 安氏)이다. 1530년(중종 25)에 태어나 1538년(중종 33)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졌다. 1559년(명종 14) 5월 9일 3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 9월 17일 양주 남면 수락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배위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1567년(명종 22) 5월 18일 사망하여 이듬해 8월 9일 덕흥대원군의 곁에 예장되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선조는 1569년(선조 2) 송나라 영종이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한 고사에 따라 생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을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능(陵)'이나 '원(園)'이 아닌 '묘(墓)'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이후 조선 왕실에서 대원군 무덤의 호칭을 정하는 선례가 되었다. 덕흥대원군은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으로, 이후 인조의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등의 묘소 조성 기준이 되었다.

묘역 구성

묘역 면적은 112㎡이며, 사성(莎城)으로 둘러싸여 있다. 봉분은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으며 높이 190cm, 둘레 15.7m의 쌍분 형태이다. 두 봉분 사이에는 묘표(墓表)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배치되어 있다.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무인석(武人石)이 각각 1쌍씩 있다. 일반적으로 왕자묘에는 문인석이 배치되나, 덕흥대원군묘에는 무인석이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 이는 대원군의 묘제(墓制)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묘비는 대리석으로 높이 168cm, 너비 53cm, 두께 18cm이며, 비문에는 '덕흥대원군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德興大院君河東府大夫人鄭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소 전방 약 20m 지점에는 1573년(선조 6)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총 높이 350cm, 비 높이 196cm, 너비 80cm, 두께 27cm이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문은 강녕군(江寧君) 홍섬(洪暹, 1504~1585)이 지었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 1517~1584)이 글씨를 썼다.

관련 시설

묘역 아래쪽에는 덕흥대원군의 장남인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묘가 있다. 인근 마을에는 덕흥대원군과 창빈 안씨, 하원군 등의 위패를 모신 덕흥사(德興祠)가 있다. 덕흥사는 원래 덕흥대원군묘의 재실(齋室)이었으나, 1950년대에 사당인 덕흥궁(德興宮)이 없어지면서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와 덕흥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선조는 1568년(선조 1) 수락산에 원당(願堂)을 짓고 흥국사(興國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덕흥대원군 부부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비공식 명칭

덕흥대원군묘는 왕의 능(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덕릉(德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인근 마을이 '덕릉마을'로 불리고 주변 도로명에도 '덕릉로'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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