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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구 경운궁) 내에 있는 건물로,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침전(寢殿, 침실 및 생활 공간)이었던 궁궐 건축물이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가유산청 덕수궁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역사

함녕전은 1897년(광무 1년)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마치고 경운궁(당시 명칭)으로 환궁하였을 당시에는 즉조당(卽祚堂)을 임시 침전으로 사용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새로운 침전 건물이 필요해지면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편, 경복궁에 있던 만화당(萬和堂)이라는 건물을 이건(移建)하여 개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승정원일기》와 《매천야록》 등을 근거로 옮겨진 만화당은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 봉안처로 사용되었다는 견해도 있어 정확한 건립 경위는 학설이 나뉜다.

1904년(광무 8년), 함녕전 내 아궁이에서 발생한 화재가 덕수궁 전체로 번지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함녕전은 전소되었다. 이 불로 인해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등 주요 건물들도 함께 소실되었다. 이후 같은 해 음력 3월에 주춧돌을 올리고 8월에 기둥을 세워 12월에 상량(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면서 재건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건물의 구조에도 일부 변화가 있었다.

고종은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후에도 이곳에 계속 머물렀으며, 1919년 1월 22일 함녕전에서 사망(승하)하였다. 고종 사후 함녕전은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었는데, 혼전은 효덕전(孝德殿)이라 불렸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탑골공원에서 모인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덕수궁 안으로 들어와 효덕전에 참배하고 만세 운동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건축 구조 및 특징

함녕전은 목조 건물로,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에 4칸이 더 붙은 'ㄱ'자형 평면을 지니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으며, 익공(翼工) 양식으로 결구된 간결한 구조이다.

내부 평면은 경복궁 강녕전(康寧殿)과 유사하게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그 옆으로 누마루를 두었다. 전면과 후면에는 툇마루와 온돌방을 추가로 두었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조선시대 궁궐 정침(正寢)의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사면 모든 칸에는 벽체를 치지 않고 정자살창(井字살窓)과 교창(交窓)을 달았으며, 지붕 마루에는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으로 장식하였다. 온돌방에 딸린 굴뚝은 건물 뒤편 석단에 검은 벽돌로 쌓고 상부에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부속 시설

함녕전의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으로, 1897년에 함께 지어졌다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덕수궁이 공원화되고 이왕가미술관이 건립될 때 광명문은 미술관 남쪽으로 이전되었다가, 2016년 발굴조사를 거쳐 2018년 '광명문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로 원래 위치로 복원되었다.

함녕전 주변에는 남행각, 서행각, 북행각 등의 행각(行閣)이 있었으며, 서행각에는 향복당(向福堂)과 풍안당(豐安堂)이라는 당호가 있었다. 북행각에는 만희당(萬喜堂)이 있었고, 1913년에는 북측행각 바깥에 구여당(九如堂)을 지으며 규모를 확장하고 복도를 조성하였다.

함녕전 북쪽에는 함유재(咸有齋)라는 건물과 화계(花階, 계단형 정원)가 조성되어 있었다. 함유재는 1898년 승정원일기에서 처음 언급되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도 고종이 머물렀고 1915년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을 접견한 기록이 전한다. 함유재는 1926년경 작성된 배치도에서 사라져 그 이전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함녕전은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서, 대한제국기의 궁궐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실제 거처하며 정치적 결정을 내린 공간이자, 말년에 유폐되다시피 머물다 생을 마감한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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