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육군(大韓帝國陸軍)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 1910년 국권 피탈에 이르기까지 존속한 대한제국의 육군 병과 조직이다. 대한제국군은 육군과 해군으로 구분되었으며, 육군은 중앙군과 지방군 체제로 편성되었다.
창설 배경과 군제 개편
대한제국 육군의 기반은 조선 후기의 군대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과정에서 기존의 군영 체제가 폐지되고 근대적 군제가 도입되었다. 1895년 9월 「육군편제강령」이 반포되어 중앙군과 지방군을 양립시키는 원칙이 수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군에는 친위대(親衛隊)가, 지방군에는 진위대(鎭衛隊)가 창설되었다. 이후 광무개혁 과정에서 군제 개편이 이루어져 중앙군으로 친위대와 시위대(侍衛隊)가, 지방군으로 진위대와 지방대(地方隊)가 운영되었다.
편제 구성
대한제국 육군은 다음과 같은 주요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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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侍衛隊): 덕수궁과 황실의 경비 및 수도 방어를 담당한 중앙군의 핵심 부대로, 1895년 5월에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친위대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편성되었으며, 을미사변 이후 해산되었다가 1897년 러시아 군사고문의 지도 아래 재편성되었다. 시위대는 러시아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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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親衛隊): 1895년 육군편제강령에 따라 창설된 중앙군 부대이다. 초기에는 2개 대대 약 1,700명 규모로 편성되었으며, 이후 증편과 축소를 반복하였다. 1897년 시위대가 부활하면서 정예병력을 시위대에 내주고 규모가 축소되기도 하였으나, 1902년 원수부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다시 확대되었다. 1905년 4월 일제의 1차 군축 요구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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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대(鎭衛隊): 지방의 수비를 담당한 지방군 부대로, 주요 도시에 배치되었다. 평양과 전주 등지에 대대급 부대가 설치되었으며, 이후 각지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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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地方隊): 구식 군영의 병졸들을 통솔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로, 점차 진위대로 흡수·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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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대(扈衛隊): 황제의 근접 경호를 담당한 부대로, 1899년 원수부가 설치되면서 창설되었다.
통수 구조
대한제국 육군의 통수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초기에는 군부(軍部)가 군사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1899년 최고통수기구인 원수부(元帥府)와 참모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어 근대적 군 통수 체계가 도입되었다. 원수부 산하에는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 등이 설치되었다.
병력 규모와 군사 훈련
대한제국 육군의 병력 규모는 시기별로 변동이 있었다. 1901년 기준 편제상 약 18,000여 명이었으며, 1904년 이전에는 중앙군인 시위대와 친위대가 각각 약 5,700명과 4,840명, 지방군이 약 18,000명에 이르렀다. 병력 충원은 국민개병제에 따른 징병제 도입 논의가 있었으나 여건상 모병제를 채택·유지하였다. 육군 장교 양성을 위해 1896년부터 육군무관학교가 운영되었다.
외국인 군사교관의 지도가 이루어졌는데, 시위대는 초기에 러시아인 교관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고 이후 일본인 교관으로 변경되었다. 주요 무기로는 소총, 권총, 크루프 75mm 야포 등이 사용되었다.
군복과 계급
1895년 서양식 군복이 도입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복장 규칙이 개정되었다. 1895년에는 정장, 군장, 예장, 상장으로 구분되었고, 1897년과 1900년에 부분 개정이 이루어졌다. 병사 계급은 상등병, 일등병, 이등병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산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대한제국 육군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4월 1차 군축으로 친위대가 해산되고 진위대가 축소되었으며, 시위대는 2,513명 규모로 축소되었다. 1907년에는 다시 군제 개혁이 이루어져 시위 보병 연대가 개편되었으나, 같은 해 8월 1일 시위대가 해산되었다. 이때 해산에 반대한 일부 부대는 일본군에 맞서 남대문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일부 병력은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가 되어 황실 근위를 맡았으며, 이들은 각각 1931년과 1913년에 해체되었다.
대한제국 육군은 근대적 군제 도입을 통해 국방력 강화를 추구하였으나, 외세의 간섭, 국가 재정의 한계, 일제의 군사력 약화 정책 등으로 인해 완전한 군사력 강화를 이루지 못하고 1907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