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大倧敎)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을 교조로 숭앙하는 한국의 신흥 민족종교이다. 1909년 1월 15일(음력), 홍암 나철(羅喆)이 서울 재동(齋洞)에서 오기호, 정훈모, 김윤식 등 10명의 동지와 함께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처음에는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창시되었다. 이듬해인 1910년 1월 1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교리와 경전
대종교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신(三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다.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삼법(三法)이다. 주요 경전으로는 고경전(古經典)인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참전계경(參佺戒經)』·『신사기(神事記)』와, 신경전(新經典)인 『신리대전(神理大全)』·『회삼경(會三經)』·『진리도설』·『구변도설(九變圖說)』 등이 있다. 4대 경절로 중광절(重光節)·어천절(御天節)·가경절(嘉慶節)·개천절(開天節)을 기념한다.
역사
창시자 나철은 1905년 백전 도인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고, 1908년 일본 도쿄에서 두일백 도인으로부터 『단군교포명서』를 받았다. 당시 일제의 대한제국 간섭이 심화되자, 그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국가 부흥의 원동력이라고 판단하고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1910년 일제의 종교 탄압이 예상되자 나철은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였다. 이에 반발한 정훈모는 같은 해 7월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분파하였으나, 이후 친일 성향으로 변절하여 1936년경 소멸하였다. 대종교는 만주 지린성 허룽 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겨 항일 독립운동의 기지로 활용하였다.
나철은 1916년 순교(자결)하였고, 이후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하였다. 3대 교주 윤세복 시기에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다. 1942년에는 윤세복 외 25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 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윤세복은 무기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과의 관계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모체 역할을 하였다. 1919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 지휘부에도 대종교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상설·김좌진·홍범도·박은식·김규식·신채호·이범석 등 주요 독립운동 인사들이 대종교와 연계되어 있었다. 북로군정서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이후 대종교 총본사는 한국으로 환국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교도 수가 약 6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 대종교 계열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진출하면서,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고 개천절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며 단군 연호와 한글 전용이 시행되는 등 민족 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미쳤다. 홍익대학교·단국대학교·경희대학교 등은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현황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대종교 신자는 약 3,766명으로 집계되었으며, 교직자는 22명, 시교당(施敎堂)과 수도원은 약 20여 곳으로 파악된다. 불교·천주교·개신교 같은 주요 종교는 물론 원불교·천도교 등과 비교하여도 교세가 미약한 군소 종교에 해당한다. 공식 웹사이트는 (http://www.daejonggyo.co.kr/)를 통해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