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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 전투

대릉하 전투(大凌河戰鬪)는 1631년 9월부터 11월까지 명(明)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명청 전쟁의 일부로서, 후금의 지도자 홍타이지(皇太極)가 이끄는 군대가 명나라의 북방 요새인 대릉하성(大凌河城, 현재의 중국 요녕성 능해시 일대)을 포위하여 점령한 사건이다.

배경

1629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군은 명나라를 침공하여 북경을 위협하는 이른바 '기사의 변(己巳之變)'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원숭환(袁崇煥)이 처형되었고, 명나라 북방 방어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후금군은 1629년 원정을 통해 난주, 천안, 준화, 영평 등 중국 동북부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홍이포(紅夷炮)와 대장군포(大將軍炮) 등 서양식 화포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명나라 장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동양성(佟養性)은 한인 군사 3천 명을 부여받고 포병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1631년에는 대포 40문을 생산하였다. 이들은 훗날 '구한병(舊漢兵)' 및 한군팔기(漢軍八旗)의 핵심이 되었다.

전투 경과

1631년 9월 1일, 대릉하성의 지휘관 조대수(祖大壽)가 약 1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을 순찰하던 중, 홍타이지가 이끄는 2만에서 8만 사이로 추정되는 후금군이 대릉하성에 도착하여 포위를 시작하였다. 후금군은 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장기 포위전을 선택하였으며, 해자를 파고 동양성의 한인 포병 부대를 요충지에 배치하였다.

명나라의 구원군이 여러 차례 파견되었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10월 초에는 조대수의 매부 오양(吳襄, 오삼계의 아버지)과 손승종(孫承宗)이 이끄는 약 4만 명의 명군이 금주 인근에 도착하였으나, 소릉하(小凌河) 전투에서 홍타이지에게 패배하였다. 10월 19일, 장춘(張春)이 지휘하는 명나라 주력 구원군도 후금군의 기병과 포병 협공에 패배하였고, 장춘은 생포되어 후금에 투항하였다.

11월 5일, 대릉하성 인근 최대 규모의 성채인 우자장대(于子章臺)가 동양성의 홍이포와 대장군포의 집중 포격 끝에 항복하였고, 이어 다른 성채들도 차례로 항복하였다. 대릉하성 내부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식인(食人)이 발생할 정도였다. 여러 차례의 사신 왕래 끝에 조대수는 금주 공격 시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11월 21일 조대수는 항복하였으며, 당시 성내 3만여 명의 인구 중 12,000명 미만만이 생존한 상태였다.

결과

조대수는 항복 직후 금주를 홍타이지에게 넘기기로 약속하였으나, 금주성에 도착한 후에는 다시 명나라를 위해 싸웠다. 이후 10년간 조대수는 금주 방어를 계속 지휘하였고, 1642년 송금 전투(松錦戰鬪)에서 두 번째로 항복하였다.

대릉하 전투는 후금에게 여러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첫째, 후금군이 포위전에서 화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둘째, 한인 포병 부대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후 팔기(八旗) 체제 내에서 한군(漢軍)의 위상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명나라의 북방 요새 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이후 청(淸)의 중국 정복으로 가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1635년 홍타이지는 민족 명칭을 여진(女眞)에서 만주(滿洲)로 변경하였고, 1636년에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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