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중국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 출신 김씨 부인의 묘지명(墓誌銘)이다. 이 묘지명은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시안 비림(碑林)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은 현무암 재질의 개석(蓋石)과 지석(誌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은 정방형으로 가로 43.5cm, 세로 44cm이며, 위쪽에 전서체로 3행에 걸쳐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고 새겨져 있다. 개석의 네 면에는 사신도(四神圖)가 새겨졌다. 지석은 가로 46.5cm, 세로 45.5cm의 정방형으로, 표면에 방격으로 계선을 그어 23행 27열로 구획하고 예서체로 총 593자를 음각하였다. 글자의 대부분은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지문의 첫머리에는 "전지계양감장사랑시어사내봉공이구부인경조김씨묘지명병서(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찬자는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 서자는 한림대조승봉랑 수건주장사(翰林待詔承奉郞守建州長史) 동함(董咸)이다.
묘지명의 내용에 따르면, 묘주인 김씨 부인은 함통(咸通) 5년(864년) 5월 29일에 3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같은 해 12월 7일에 만년현(萬年縣) 산천향(滻川鄕) 상부촌(上傅村)의 선대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주의 증조부는 김원득(金原得), 조부는 김충의(金忠義), 부친은 김공량(金公亮)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의 문헌 자료에서 조부 김충의가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일족이 어느 시기에 당으로 건너온 신라인임을 알 수 있다.
묘지명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김씨 성의 기원에 대한 서술이다. 묘지명은 김씨의 시조가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한(漢) 무제에게 귀의하여 벼슬을 지냈던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金日磾)를 먼 조상으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한나라의 덕이 쇠하여 난리가 나자 후손들이 곡식을 싸들고 난을 피해 '요동(遼東)'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여 신라에 정착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요동'은 오늘날의 랴오둥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상 신라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의 요동', 즉 해동(海東)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묘지명의 가계 기원 서술은 신라 문무왕릉비에서 소호금천씨-김일제-신라 왕족 김씨로 이어지는 시조 관념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신라 왕실이 소호금천씨와 김일제를 통해 성씨의 유래를 서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려우며, 다분히 관념적인 시조 의식의 소산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이 묘비명에 대해 당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시조 의식을 유지하던 재당(在唐)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하면서도, 신라 김씨가 실제로 김일제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한편 이 묘지명은 묘주 선대의 활동상을 상세히 보여준다. 조부 김충의는 기존 문헌 자료에서 소부감(少府監)을 역임한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나, 이 묘지명에 따르면 한림대조(翰林待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내중상사(內中尙使)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음이 확인된다. 부친 김공량은 문헌 기록에 관직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묘지명에는 한림대조와 장작감승(將作監丞), 내작판관(內作判官)을 역임했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김씨 부인 가문이 신라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여러 대에 걸쳐 당 왕실에서 고위 관리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9세기 당시 장안에 거주하며 관직을 역임했던 재당 신라인 일족의 4대에 걸친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신라 김씨의 시조 인식과 관련된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