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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학살

달 학살(Dalj massacre)은 1991년 8월 1일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중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에 위치한 달(Dalj)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다. 이 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영토방위군과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의 지원을 받아 달 마을을 공격하였고, 크로아트인 민간인과 크로아티아 경찰관, 국가방위군 병사 등 총 56~57명이 사망하였다.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총선거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승리한 이후, 크로아티아 내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사이의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1990년 8월에는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였고, 크닌을 중심으로 세르브계 자치 지역이 선포되었다. 1991년 5월에는 달 마을 남쪽에서 보로보셸로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6월에는 동슬라보니아 지역의 세르브계가 SAO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아(SAO BAWS)를 자치 정치체로 선포하였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자체 정규군이 없었고 경찰력을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7월에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다.

전개

1991년 8월 1일 오전 3시부터 4시 30분 사이에 달, 에르두트, 알마시 3개 마을이 포격을 받았다. 포격 이후 젤코 라주나토비치(일명 아르칸)가 이끄는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브계 영토방위군이 3개 조로 나뉘어 달 마을로 돌입하였다. 첫 번째 조는 달 경찰서를, 두 번째 조는 마을 상수도원 인근의 ZNG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크로아티아 경찰과 국가방위군 병사는 달 경찰서에서 격렬하게 방어전을 펼쳤으나, 유고 인민군 전차 3대가 경찰서를 향해 발포하면서 상황이 결정되었다. 크로아티아 측에 따르면 항복한 병력들도 포로로 잡힌 이후 살해당했다. 이 전투로 크로아티아 경찰 20명, 국가방위군 병사 15명, 민방위원 4명 등 총 39명이 사망하였고, 같은 날 비세르브계 민간인 다수도 학살당했다.

여파

학살 이후 달 마을과 주변 지역의 크로아트인들은 강제 추방되거나 감금 및 학대를 당한 후 살해당했다. 9월 21일에는 포로 11명이 학살당해 첼리예 마을의 집단무덤에 묻혔고, 10월 4일에는 달 수용소에 구금된 민간인 28명이 고문과 학살을 당한 후 도나우강에 시신이 버려졌다. 1992년 5월까지 달 마을에서 최소 135명의 크로아트인과 비세르브계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달 학살 사건은 독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이는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국제적으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이어졌다. 1991년 12월 독일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 중 최초로 크로아티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였다.

전범 재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와 고란 하지치(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대통령)를 비롯한 세르비아 및 SAO BAWS 고위 인사들을 달 지역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였다. 밀로셰비치는 2006년 평결 선고 전 사망하였고, 하지치는 2016년 말기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세르비아 내무부 국가보안청 청장 요비차 스타니시치와 특수작전부대 사령관 프란코 시마토비치도 기소되었으나 2013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후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혀 재판이 계속되었다. 2010년에는 유고 인민군 제51기계화여단 지휘관 에네스 타소가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었다.

2013년 달 경찰서는 크로아티아 정부로부터 니콜라 4세 즈린스키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학살 22주년을 맞아 달 역에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같은 해 11월에는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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