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노 가치코(橘嘉智子, 786년~850년 6월 17일)는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의 인물로, 제52대 천황인 사가 천황(嵯峨天皇)의 황후이다. 일본어 표기는 'たちばな の かち코'이며, 단린지(檀林寺)를 창건한 데에서 유래한 '단린 황후(檀林皇后)'라는 별호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가계와 출신
다치바나노 가치코는 다치바나 씨(橘氏) 출신으로,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의 손녀이자 증태정대신(贈太政大臣) 다치바나노 키요모토(橘清友)의 딸이다. 어머니는 다구치 이에오모(田口家守)의 딸인 다구치 산젠히메(田口三千媛)이다. 형제로는 우대신(右大臣)을 지낸 다치바나노 우지키미(橘氏公)가 있다. 다치바나 씨 출신으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황후로 기록된다.
생애
사가 천황이 아직 친왕이던 시절에 입시(入侍)하여, 천황 즉위 후인 다이도 4년(809년) 6월에 부인(夫人)이 되어 정4위하에 올랐다. 이듬해인 고닌 원년(810년) 11월에는 종3위에 승진하였다. 고닌 6년(815년) 7월 13일 황후에 봉해졌으며, 사가 천황과의 사이에서 닌묘 천황(仁明天皇)과 마사코 내친왕(正子内親王)을 비롯한 2남 5녀를 두었다.
사가 천황의 준나(淳和) 천황으로의 양위에 따라 고닌 14년(823년) 4월 23일 황태후가 되었고, 아들 닌묘 천황이 즉위한 덴초 10년(833년) 3월 2일에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다. 가쇼 3년(850년) 3월에 출가(落飾)하였으며, 같은 해 5월 4일 헤이안쿄(平安京)의 레이제이인(冷然院)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불교 신앙과 업적
다치바나노 가치코는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었으며, 사가노(嵯峨野)에 일본 최초의 선종(禪宗) 사원으로 알려진 단린지를 창건하였다. 이로 인해 '단린 황후'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다치바나 씨 자제의 교육을 위해 대학별조(大學別曹)인 학관원(學館院)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사가 상황(上皇) 사후에도 태황태후로서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닌묘 천황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와의 변(承和の變, 842년)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폐태자 쓰네사다 친왕(恒貞親王)이 폐위되었는데, 쓰네사다 친왕의 생모가 자신의 딸 마사코 내친왕이었던 관계로 마사코 내친왕은 어머니인 가치코를 깊이 원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화
다치바나노 가치코에 관한 대표적인 일화로는,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길가에 방치하도록 유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자신의 몸을 새나 짐승의 먹이로 삼아 굶주림을 구제하고, 동시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보리심(菩提心)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녀의 시신이 썩고 백골화되는 과정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으며, 그 변화 과정을 화공에게 그리게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다만 이는 야사(野史)적 성격의 일화로, 역사적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당(唐)의 선종 승려인 기쿠(義空)을 일본에 초청하여 단린지에서 선종 강의를 하게 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선종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것에 실망한 기쿠는 수년 만에 당으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평가
다치바나노 가치코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정치적·종교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다치바나 씨 출신의 유일한 황후로서 귀족 사회에서 다치바나 씨의 지위를 크게 상승시켰으며, 일본 초기 선종 사원의 창건과 불교 신앙의 확산에 기여한 인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