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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이쇼 데모크라시(일본어: 大正デモクラシー, Taishō Democracy)는 일본 제국에서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초기까지, 대략 1905년부터 1932년에 이르는 시기에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적·자유주의적 경향과 그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 개념이다.

용어의 성립과 시기 구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는 역사학자 시노부 세이사부로(信夫清三郎)가 1954년 저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사(大正デモクラシー史)》에서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학술 용어로 정착하였다. 시기의 시작에 대해서는 1905년의 히비야 방화 사건(히비야 소각 사건)을 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종점에 대해서는 1925년의 보통선거법 성립까지로 보는 견해와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로 보는 견해, 1932년 5·15 사건으로 정당 내각이 붕괴된 시점까지로 보는 견해 등이 존재한다. 학자에 따라 시기 설정에 차이가 있으나, 다이쇼 천황의 재위 기간(1912~1926)을 중심부로 하고 1918년을 하나의 획기로 보는 점에서는 대체로 공통된다.

배경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배경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발전, 도시 중간층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 그리고 교육 보급에 따른 문맹률 감소와 대중 언론의 발달이 있었다. 메이지 헌법(1889)은 천황에게 주권을 부여하면서도 선출된 중의원을 설치하여 정당 정치가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러일 전쟁(1904~1905)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면서 전쟁 비용 부담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표출되었고, 이는 정치 참여 요구로 이어졌다.

전개 과정

제1기(1905~1912): 1905년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 반대하는 히비야 방화 사건을 시작으로, 번벌(藩閥) 정치에 반대하는 도시 민중 운동이 전개되었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안으로는 입헌주의'를 기치로 한 이 시기 운동의 주체는 도시 중간층이었다.

제2기(1912~1918): 1912~1913년의 제1차 호헌 운동(호헌 운동)은 육군의 2개 사단 증설 요구를 계기로 번벌 세력에 저항하는 전국적 민중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쓰라 다로 내각을 붕괴시켰다. 이는 민중 운동이 정부를 무너뜨린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으로 인한 전시 호황은 비특권 자본가 계층의 반동화를 초래했으나, 한편으로 도시 중간층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운동의 저변은 확대되었다.

제3기(1918~1924): 1918년 전국을 휩쓴 쌀소동(미소동)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으로 특권 번벌 내각이었던 데라우치 내각이 붕괴되고, 1918년 9월 하라 다카시(原敬)를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본격적 정당 내각이 성립하였다. 같은 시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국제 노동 기구(ILO)의 설립 등 국제적 민주화 압력 속에서 보통선거 운동,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부락 해방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이론가는 도쿄 제국대학 정치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였다. 그는 1916년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주창하였는데, 이는 주권의 소재(천황)를 문제삼지 않고 주권 운용의 목적을 민중의 이익에 두고 그 운용을 민중의 의사 결정에 맡긴다는 개념이었다. 요시노는 구체적 정책으로 보통선거와 정당 내각제의 채택, 대외적 무단적 침략 정책의 포기를 주장하였다. 한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천황기관설을 통해 천황의 신격적 절대성을 부정하고 정당 내각제의 합헌성을 주장하였다.

성과와 한계

1924년 제2차 호헌 운동의 결과 성립된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은 1925년 보통선거법(25세 이상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을 제정하여 유권자 수를 약 300만 명에서 1,250만 명으로 확대하였다. 같은 시기 치안유지법(1925)도 함께 제정되어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정우회와 민정당(구 헌정회)의 양대 정당이 교대로 내각을 조직하는 정당 정치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 체제 자체는 개혁되지 않았고, 추밀원·귀족원·참모본부·군령부 등 의회 중심주의를 위협하는 제도적 장치들은 존속하였다. 기성 정당은 노동조합법·소작법 등 사회적 보호 입법 제정에 소극적이었고, 자본과의 결탁으로 부정부패가 확산되었다.

종언과 유산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충격과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군부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되면서 정당 내각은 붕괴되고 '국민 통일 내각' 체제로 이행하였으며, 이후 군부 주도의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형성된 민중 조직과 민본주의 사상은 전시 하에서도 잠재력을 유지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 점령 하의 민주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역사학자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은 이 시기의 내재적 모순을 포착하여 '제국 데모크라시(imperial democracy)'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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