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다니엘레 마닌

다니엘레 마닌(Daniele Manin, 1804년 5월 13일 ~ 1857년 9월 22일)은 이탈리아의 정치인으로, 19세기 베네치아(베네치아)의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1848년 혁명 시기에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산마르코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출생과 가문

다니엘레 마닌은 베네치아에서 '다니엘레 폰세카'(Daniele Fonsec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안토니오 폰세카(Pietro Antonio Fonseca)는 베로나 출신 가문으로, 원래 유대인 가문(메디나 가문) 출신이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도제(總督)였던 루도비코 마닌(Ludovico Manin)이 개종 과정에서 후원자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마닌'이라는 성씨를 취하게 되었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 벨로토는 파도바 출신이었다.

혁명 이전의 활동

마닌은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와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시 베네치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847년에는 오스트리아가 허용한 자문 기구인 베네치아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국민의 요구 사항을 황제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이어 1848년 1월 대역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이 사건은 오히려 베네치아 시민들의 동요를 더욱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848년 혁명과 산마르코 공화국

1848년 3월 17일, 베네치아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혁명의 물결 속에서 마닌은 석방되었다. 혁명가들은 베네치아 병기창을 장악하고 마닌의 지휘에 따라 시민군과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이 3월 26일 베네치아에서 철수하면서, 마닌은 새로 수립된 산마르코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마닌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사르데냐-피에몬테(피에몬테) 왕국으로의 합병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스토차 전투에서 피에몬테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베네치아는 고립되었다. 이후 베네치아 의회가 소집되었고 마닌을 수장으로 하는 삼두정치가 발족하였다.

1848년 말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 본토 전역을 재점령하였다. 1849년 초 마닌은 다시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의 포위 속에서 도시 방어를 지휘하였다. 베네치아는 1849년 8월까지 버텼으나, 마르게라 요새의 상실, 화약고 폭발, 콜레라 발생 등으로 인해 결국 항복에 이르렀다. 1849년 8월 24일 마닌은 오스트리아 측과 협상하여 본인과 주요 혁명 지도자들의 사면을 얻어내고, 8월 27일 프랑스 선박을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과 말년

마르세유에 도착한 뒤 마닌은 아내와 사별하고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그는 이탈리아 혁명가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군주주의적 입장으로 전향하여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이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르조 팔라비치니, 주세페 라 파리나 등과 함께 이탈리아 국민 협회를 설립하여 피에몬테 왕국 주도의 통일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1857년 9월 22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후 파리 외곽의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868년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에서 철수한 지 2년 후인 이후 고향 베네치아로 이장되어 국장으로 안치되었다. 오늘날 그의 유해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 북쪽 피아체타 데이 레온치니에 위치한 석관에 안치되어 있다.

역사적 평가

다니엘레 마닌은 베네치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에 맞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활을 꾀한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평가된다. 그의 지도 하에 수립된 산마르코 공화국은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의 자주와 통일 운동에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남겼으며, 이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도 상징적 위상을 지닌다. 베네치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