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 피로스마니(ნიკო ფიროსმანი, Niko Pirosmani, 1862~1918)는 조지아(그루지야)의 원시주의(naïve art) 화가이다. 본명은 니콜라이 아슬라노비치 피로스마나슈빌리(니콜로즈 아슬라니스 제 피로스마나슈빌리)이며, 니카라(ნიკალა)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생애
니코 피로스마니는 1862년 5월 5일(구력 5월 17일) 조지아 카헤티주 미르자아니(Mirzaani)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0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곧이어 어머니와 형도 잃어 고아가 되었다. 이후 트빌리시로 이주하여 부유한 집안인 칼란타로프가의 하인으로 일하며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를 배웠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1876년경 고향으로 돌아와 목동으로 일했고, 1880년대 중반에는 화가 지고 자지아슈빌리와 함께 트빌리시에서 장식 그림 작업실을 열었으나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1890년 철도 차장으로 취업했고, 1894년 퇴사 후 우유 판매업을 시작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1900년경부터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여 주로 상점 간판, 선술집 벽화, 초상화 등을 그렸다.
1912년 여름, 러시아 미래파 예술가들인 일리야 즈다네비치와 키릴 즈다네비치 형제, 미하일 레단튀 등이 그의 작품을 발견하고 알리기 시작했다. 1913년 2월 일리야 즈다네비치는 신문에 그를 '천부적 예술가'로 평가하는 기사를 게재했고, 같은 해 3월 모스크바 미래파 전시회 '미셴(Мишень)'에 그의 작품 4점이 전시되었다. 1916년에는 트빌리시에서 단독 전시회가 열렸고, 조지아 미술가 협회에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지도 상승이 그의 경제적 상황을 크게 개선하지는 못했다.
1918년 4월 7일(또는 4월 9일), 트빌리시에서 영양실조와 간경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빈민 공동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 세계
피로스마니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순수 예술(naïve art)의 대표적 거장으로 평가된다. 그는 주로 검은색 유포(기름을 바른 천)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당시 트빌리시에서 기술용으로 생산되던 검은색 무광택 유포를 구매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 제한된 색채, 검은 배경과 흰색 인물의 강한 대비가 특징이다. 초상화, 동물화, 정물, 일상 풍경, 향연 장면 등을 주제로 삼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약 200점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조지아 국립미술관(트빌리시), 시그나기 박물관, 미르자아니 하우스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 현대미술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미술관에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영향과 평가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 재평가되어 조지아의 국민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1972년 피카소는 피로스마니의 초상화를 에칭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1969년 조지아 화가 최초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조지아 5라리 지폐에는 그의 그림이 도안으로 사용되었고, 과거 1라리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들어갔다.
대중문화 속의 니코 피로스마니
피로스마니의 삶은 여러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 드 세브르(마르가리타)에 대한 그의 사랑 이야기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로 쓰여졌고, 이 시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의 곡에 붙여져 알라 푸가초바가 부른 노래 '백만 송이 장미(Миллион роз)'로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는 한국에서 심수봉이 '백만송이 장미'로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1969년에는 기오르기 셴겔라이아 감독의 영화 《피로스마니》가 제작되었고, 1985년에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단편 영화 《피로스마니를 주제로 한 아라베스크》가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