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고분은 고대 한사군(漢四郡)의 중심지였던 낙랑군(樂浪郡) 지역에서 조성된 무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에 걸쳐 분포하며,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후 4세기경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 근교 토성리(土城里) 일대에는 남북 10여 리, 동서 수십 리에 걸쳐 약 1,300여 기 이상의 낙랑고분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해도 지역에도 다수 분포한다.
낙랑고분의 묘제(墓制)는 크게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이 가장 일반적이며, 이 외에도 독널무덤(甕棺墓), 기와널무덤(瓦棺墓), 소형 벽돌덧널무덤(塼槨墓) 등이 일부 포함된다. 널무덤은 낙랑 관련 묘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형식으로, 세형동검 유형의 청동기를 부장하던 전 단계의 재지계 움무덤(土壙墓)과 계승 관계가 인정된다. 덧널무덤은 홑무덤(單葬)과 합장(合葬) 방식으로 나뉘며, 합장은 다시 병혈합장(竝穴合葬)과 동혈합장(同穴合葬)으로 구분된다. 동혈합장 덧널무덤은 1~2세기대에 유행한 최고위급 무덤으로 평가된다. 벽돌방무덤은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대에 가장 유행하였으며, 낙랑·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 계속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낙랑고분의 묘제는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다른 국가들의 묘제와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이며, 중국 한(漢)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벽돌방무덤의 활모양 궁륭식(穹窿式) 천장은 구조적으로 무게 분산을 꾀한 건축 기술의 정수로 꼽힌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 동기, 철기, 도기, 옥기, 목기, 칠기, 장신구, 문방구, 인(印), 명기(明器) 등이 매우 풍부하게 확인되었다. 특히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용호금수경(龍虎禽獸鏡),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등의 청동거울은 정밀한 세공 기술을 보여주며 연대 구분의 표지적 유물로 기능한다. 칠기에 적힌 명문을 통해서는 연대, 관명, 제작자, 제작 장소 등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며, 칠기에 표현된 그림과 글씨, 금속 장식 등을 통해 당시의 회화 수준도 엿볼 수 있다.
낙랑고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09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으며, 1916년 이후 조선총독부 주도로 대규모 발굴이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낙랑고분 출토 유물이 한반도 북부가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식민사관을 입증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상당수의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북한 학계가 발굴을 주도하여 1990년대까지 2,000기 이상의 낙랑고분이 조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전모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석암리 9호분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간하였는데, 이 보고서는 부장품 상당수가 중국 중원뿐 아니라 남방 지역 및 북방 유목민 계통의 교역품임을 밝혀내어 낙랑 사회가 중원 정권에 강하게 예속되지 않고 국제 교역망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교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