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반란은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에서 발생한 일련의 반란·봉기를 지칭하는 역사 용어이다. 동일한 명칭 아래에서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두 사건이 알려져 있으며, 시기에 따라 그 성격과 배경이 상이하다.
1647년 반란 (마사니엘로 반란)
1647년 반란은 합스부르크 스페인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나폴리 왕국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이다. 30년 전쟁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스페인 정부가 과일 등 일상 식품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자, 이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1647년 7월 7일 나폴리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봉기는 어부 출신의 토마소 아니엘로(마사니엘로, 1620~1647)가 주도하였으며, 그의 지휘 아래 반군은 스페인 총독의 통치에 맞서 나폴리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약 1년 후 오스트리아의 요한 요제프가 이끄는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프랑스-스페인 전쟁(1635~1659) 시기에 스페인 통치에 대한 여러 반란 중 하나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0년 반란
1820년 반란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가 수립된 시기에 나폴리 왕국에서 발생한 자유주의적 반란이다. 1820년 7월, 그 해 초 스페인 반란(리에고 반란)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나폴리의 자유주의 세력이 일으켰으며, 부르봉 왕가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자유주의 헌법의 채택을 요구하였다. 이 반란은 에스파냐 반란과 함께 빈 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도전으로 평가된다.
빈 회의에서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둘러싸고 조아생 뮈라와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후의 페르디난도 1세) 사이에 외교적 경쟁이 있었으나, 백일천하 때 뮈라가 나폴레옹 편에 섬으로써 그의 정치적 운명은 워털루 전투의 패전과 함께 끝났고, 빈 최종의정서는 페르디난도 4세의 왕위 복위를 규정하였다.
1820년 반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이 자유주의 운동이 중부 이탈리아 여러 공국의 내정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진압을 주장한 반면, 영국은 에스파냐 반란에 대한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나폴리 사태 해결을 위해 트로파우 회의(1820)와 라이바하 회의(1821)가 열렸으나 강대국 간 합의가 어려웠다.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임시 자유주의 헌법에 따라 구성된 나폴리 의회의 허락을 받고 국외로 출국하였으나,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열강에 진압 개입을 호소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동원하여 1821년 3월 나폴리에 진주, 반란을 진압하였다.
나폴리 왕국에서의 반란·혁명 운동은 이외에도 179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 혁명(파르테노페아 공화국 선언), 1848년 혁명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한 바 있으며, 이들 사건을 포괄하여 '나폴리 반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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