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조민(中江 兆民, 1847년 12월 8일 ~ 1901년 12월 13일)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명은 나카에 도쿠스케(中江 篤介)로, "조민(兆民)"은 본명이 아닌 호(號)이며 "억조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일본에 소개하고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동양의 루소"(東洋のルソー)로 평가받았다.
생애
나카에 조민은 1847년 도사번(土佐藩)의 고치성 아래 야마다초에서 태어났다. 1861년 아버지 사망 후 가독을 이어받아 아시가루(足軽) 계급이 되었고, 번교인 문무관에서 수학했다. 1865년에는 도사번의 파견 유학생으로 나가사키에서 공부했으며, 같은 번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와 교류했다. 이후 프랑스어를 배워 번역·통역 업무에 종사했다.
1871년 폐번치현 이후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사법성 관료 자격으로 미국과 프랑스를 방문했다. 파리와 리용에 체류하며 프랑스의 정치·사상을 연구했고, 사이온지 긴모치와도 교류했다.
1874년 귀국 후 도쿄에 불란서학사(仏蘭西学舎)를 설립하고 프랑스어와 서양 사상을 가르쳤다. 같은 시기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발췌 번역한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했고, 1882년에는 여기에 해설을 더한 《민약역해》(民約譯解)를 출간했다. 이 저작들을 통해 일본에 루소의 인민주권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1881년에는 사이온지 킨모치 등과 함께 《동양자유신문》(東洋自由新聞)을 창간해 주필을 맡았고, 이후 자유당의 기관지인 《자유신문》(自由新聞)의 주필로도 활동했다.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나 정식으로 자유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1887년 나가노에서 고토 쇼지로의 농상무대신 사직을 요구하는 건의서 운동에 참여했다가 보안조례에 걸려 도쿄에서 추방되었고, 1888년에는 불란서학사도 폐교되었다.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오사카 제4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출마 당시 그는 부라쿠민(部落民)을 지지 기반으로 삼겠다는 선언을 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입헌자유당 내부의 정부 예산안 승인 문제에 반발하여 1891년 2월에 사직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홋카이도 오타루로 이주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오타루 최초의 신문인 《북문신보》(北門新報)를 창간했고, 이후 고치야 영업, 목재업, 철도 회사 발기인, 청소 회사 설립 등 다양한 사업에 참여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말년에는 후두암에 걸려 투병하면서도 《일년유반》(一年有半)과 《속일년유반》(続一年有半) 등의 저술을 남겼다. 1901년 12월 13일 오사카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도쿄의 아오야마 영원에 묻혔다.
사상
나카에 조민의 사상은 프랑스 계몽사상, 특히 루소의 인민주권론과 천부인권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양 사상, 특히 맹자의 사상에서도 영향을 받아 평화 이념을 구축한 것으로 연구된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는 《삼취인경륜문답》(三酔人経綸問答, 1887년)이 있으며, 이는 술에 취한 세 인물의 대화 형식으로 일본의 근대화와 정치 체제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 정치사상서이다.
평가
나카에 조민은 메이지 시대 자유민권운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루소의 사상을 일본에 번역·소개한 공로로 "동양의 루소"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에는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가 있다. 그는 일본 근대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기인(奇人)으로도 유명하여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