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베시마 가쓰시게(일본어: 鍋島勝茂)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히젠(肥前) 사가번(佐賀藩)의 초대 번주로서, 생몰 연대는 1580년(덴쇼 8년) 12월 4일부터 1657년(메이레키 3년) 5월 7일까지이다. 류조지 씨(龍造寺氏)의 중신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과 배경
가쓰시게는 히젠 국에서 류조지 가문의 실권자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이마자토 성주 이시이 쓰네노부의 차녀 히코즈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한때 류조지 다카노부의 차남 에가미 이에쓰구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류조지 다카노부 사후 류조지 마사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히젠 국 7군 30만 9902석을 안도받았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중신인 나오시게가 위임받아 맡게 되면서 나베시마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가쓰시게는 다이묘의 후계자(세자)로서 대우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후시미성 공격과 이세 안노쓰성 공격에 참여하는 등 서군의 주요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나오시게의 급사(急使)에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군으로 전향하여,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야나가와성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구루메성을 공격하였다. 세키가하라 본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사가번 초대 번주로의 취임
1607년 류조지 다카후사와 마사이에가 연달아 사망하자, 가쓰시게는 막부의 공인 아래 류조지 가문의 유령(遺領)을 승계하여 사가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검지를 실시하여 35만 7000석의 석고를 확정하였고, 아버지 나오시게의 후견 아래 번정을 총괄하였다. 그는 류조지 가문에서 나베시마 가문으로의 권력 이양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가신단 정비와 기서문 제출을 통해 내란을 방지하였다. 다만 구 류조지 가신단과 나베시마 가문의 가신단 양측에 대한 숙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석고가 가신단의 지행(知行)으로 분배되었고 번주의 직할령은 약 6만 석에 불과하여, 사가번은 번정 초기부터 재정문제를 겪었다. 이에 따라 이후 사가번은 간척 사업 등 증수 정책에 지속적으로 힘쓰게 되었다.
지방 통치와 시마바라의 난
1602년부터 사가성과 하스노이케성을 근세 성곽으로 개축하는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이는 나베시마 가문 통치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
1637~1638년에 발생한 시마바라·아마쿠사 일대의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에서는 가쓰시게가 직접 출진하여 사가번 세력이 하라성 본환(本丸)에 최초로 돌입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군령 위반으로 지적되어, 난 종결 후 폐문(閉門) 처분을 받았다. 1642년부터는 나가사키 경비(長崎御番)를 명령받았으며, 이는 이후 11대에 걸친 나베시마 가문의 임무로 이어졌다.
죽음과 유산
가쓰시게는 1657년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사가현 사가시의 고덴지(高伝寺)에 있다. 가문의 뒤는 손자인 나베시마 미쓰시게가 이었다. 그의 아들 중에는 나베시마 다다나오(忠直), 하스노이케 나베시마 가문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즈미(直澄), 가시마 나베시마 가문 계열의 나베시마 나오토모 등이 있다. 정실은 도다 가쓰타카의 딸이며, 계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고겐인(高源院)이다.
가쓰시게의 애도(愛刀)로는 무라마사 작의 '묘호 무라마사'(妙法村正)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NHK 대하드라마 『葵 徳川三代』(2000년), 영화 『마계전생』(1981년) 등 여러 창작 작품에서도 다루어진 인물이다.
나베시마 가쓰시게는 에도 시대 초기 사가번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행보, 사가번 성립 과정, 시마바라의 난에서의 전과 등 일본 근세사 연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