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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에우꽁띠엔

끼에우꽁띠엔(베트남어: Kiều Công Tiễn, 한자: 矯公羨, 870년 ~ 938년)은 오대 십국 시대 안남(安南) 지역의 호족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정해군(靜海軍) 절도사 자리를 두고 권력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 인물이다. 베트남 역사상 자주(自主) 시기 초기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과 표기

흔히 쓰이는 한자 표기는 '矯公羨'이며, 일부 문헌에서는 '皎公羨'으로도 기록되었다. 베트남어로는 주로 'Kiều Công Tiễn'으로 음역되지만, 《흠정월사통감강목》이나 쩐쩌옹낌(Trần Trọng Kim)의 《월남사략》 등 일부 사료에서는 'Kiểu Công Tiện'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신오대사(新五代史)와 십국춘추(十國春秋)에서는 '皎公羨'(교공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

끼에우꽁띠엔은 870년, 당나라 시대 정해군 관할의 봉주(峰州, 현재의 베트남 푸토성 비엣찌 지역) 출신으로, 당시 그 지역에서 명망 있는 호족이었다. 그는 931년 정해군 절도사가 된 즈엉딘응에(Dương Đình Nghệ, 양정예)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동했으며,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의 양자(義子)였다.

937년 음력 3월, 끼에우꽁띠엔은 자신을 거두었던 주군 즈엉딘응에를 살해하고 스스로 절도사 자리를 찬탈하였다. 이에 즈엉딘응에의 또 다른 장수이자 사위였던 응오꾸옌(Ngô Quyền, 오권)이 9개월 후 애주(愛州, 현재의 타인호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반기를 들어 복수에 나섰다.

응오꾸옌의 공격에 직면한 끼에우꽁띠엔은 남한(南漢)의 유호(劉昊, Liu Yan)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남한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정해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였으며, 유호는 자신의 아들 유홍조(劉弘操)를 정해군 절도사 겸 교왕(交王)으로 임명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남한 군대가 국경에 도착하기 전인 938년, 응오꾸옌이 끼에우꽁띠엔을 격파하고 처형하였다. 이어 응오꾸옌은 박당강(白藤江) 전투에서 남한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남한의 유홍조가 전사하고 유호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리로 응오꾸옌은 베트남의 독립을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약 천 년에 가까운 중국 지배 이후 베트남의 지속적인 독립 시대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평가

베트남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끼에우꽁띠엔이 주군인 즈엉딘응에를 시해하고 중국 세력인 남한에 원조를 요청한 행위를 두고, 역사상의 찬탈자이자 반역자로 규정한다. 그의 행동은 응오꾸옌의 반란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끼에우꽁띠엔 사후, 그의 손자들인 끼에우꽁한(Kiều Công Hãn)과 끼에우투언(Kiều Thuận)은 응오 왕조가 붕괴된 이후 십이사군(十二使君)의 난 시기 주요 군벌 중 하나로 활동하였다.

참고 문헌

  •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외기 5권
  • 소쿠라 다케오(小倉貞男), 《베트남의 역사 이야기》(物語ヴェトナムの歴史), 중공신서
  • Ngô Sĩ Liên (1993),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 Trần Trọng Kim (1971), 《Việt Nam sử lược》
  • Keith Weller Taylor (1991), 《The Birth of Vietna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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