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디시야 전투(Battle of al-Qadisiyah, 아랍어: معركة القادسية)는 636년 11월 16일부터 19일까지,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알 까디시야(Al-Qadisiyah)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Sa'd ibn Abi Waqqas)가 지휘하는 라시둔 칼리파국(정통 칼리파)의 이슬람 군대와 로스탐 파로흐자드(Rostam Farrokhzād)가 지휘하는 사산 제국(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전투 배경
7세기 초, 사산 제국은 호스로 2세 치하에서 비잔틴 제국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진되었고, 호스로 2세 사후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를 기치로 통일된 아랍 세력이 등장하여 633년부터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는 초기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할리드가 시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전세는 일시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635년, 사산 제국의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와 비잔틴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이슬람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으나, 실질적인 공동 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636년 8월, 비잔틴 군대가 야르무크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사산 제국은 홀로 이슬람 군대에 맞서야 했다. 칼리파 우마르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여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메소포타미아로 파견하였다.
양측의 전력
이슬람 군대의 규모는 약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수치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슬람 군대는 보병(창병, 궁병)과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보병은 체인메일 등으로 비교적 중무장한 편이었다.
사산 군대의 규모는 기록에 따라 3만 명에서 20만 명까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이슬람 군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을 것으로 널리 추정된다. 사산 군대는 보병, 경기병(궁기병 포함), 중기병(카타프락토이), 그리고 전투 코끼리 부대로 구성되었다. 전투 코끼리는 사산 군대의 주요 특징 중 하나였다.
전투 경과
전투는 4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양측이 일기토와 본격적인 교전을 벌였으나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셋째 날, 사산 군대의 전투 코끼리가 이슬람 군대의 전술(코끼리의 약점 집중 공격)에 무력화되어 퇴각하였고, 이 과정에서 코끼리 부대가 아군 전열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이슬람 기록에서는 이 밤을 '라일랏 알 하릴'(웅성거리는 소음의 밤)이라고 부른다.
넷째 날, 이슬람 군대의 장군 까까 이븐 아므르(al-Qa'qa' ibn Amr)가 공세를 재개하여 사산 군대의 전열을 돌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산 군대의 총사령관 로스탐 파로흐자드가 전사하였다. 총사령관을 잃은 사산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일부는 조직적인 퇴각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다.
결과 및 의의
까디시야 전투에서의 패배는 사산 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인 637년 3월, 이슬람 군대는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을 함락시켰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642년 니하완드 전투에서 사산 군대가 다시 패배하면서 사산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사망하면서 400여 년간 지속된 사산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란 지역은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다.
까디시야 전투는 사산 제국의 몰락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전투로 평가된다. 현대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 이 전투의 이름을 딴 '카디시야의 검'(Swords of Qādisiyyah)이라는 개선문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