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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投降倭人) 장수이다. 일본명은 사야카(沙也可)이며,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귀화 후 조선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출생과 배경

1571년 1월 28일(음력 1월 3일)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공신력 있는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귀화와 활동

1592년(선조 25년) 동래성 상륙 다음 날,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항복하고 조선에 귀순하였다. 귀순 당시 그는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이라는 내용의 강화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경상도 의병들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곽재우(郭再祐)와도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모두 78회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유재란(1597년) 때는 의령 전투와 울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후 도원수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와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귀화 후에는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조선 측에 전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순신을 비롯하여 이덕형, 정철, 권율, 김성일, 곽재우 등 당대 인물들과 서신을 교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이후 북방 변경 방어를 자청하여 10년 동안 수비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는 이괄의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포획·참수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군사 500여 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1642년(인조 20년) 10월 23일(음력 9월 30일)에 사망하였으며, 경상도 대구도호부 상수남면 우록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일대)에 안장되었다. 사후 삼정산(三頂山)에 묻혔고,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다. 녹동서원은 1798년(정조 22년) 지방 유림들이 창건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에 재건되었다.

가계와 후손

1600년(선조 33년)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와 혼인하여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녹동서원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저서

저서로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 3권이 전한다. 이 문집은 김충선의 6대손 김한조가 간행하였으며, 행록(行錄)은 첫째 아들 김경원이, 묘지(墓誌)는 첫째 손자 김진명이, 묘갈(墓碣)은 유비(兪柲)가, 전(傳)은 이의숙이 지었다.

역사적 의의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적장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하여 평생 조선을 위해 활동한 대표적 항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선조실록》, 《인조실록》, 《모하당문집》 등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임이 확인된다. 다만 일본 측 사료와의 대조 및 일부 세부 행적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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