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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첨

김첨(金瞻)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디지털광주문화대전 등 공인된 역사 정보원에 수록된 실존 역사 인물이다. 1354년에 태어나 1418년에 사망하였으며,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구이(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이다. 광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이며, 자혜부윤 김회조(金懷祖)의 아들이다.

1376년(고려 우왕 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친종호군(親從護軍)·우사간(右司諫)·예조전서(禮曹典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경연관(經筵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직후 정몽주와의 연루 의혹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404년(조선 태종 4)에는 계품사(計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여진족과 관련된 영토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였고, 이 공로로 태종으로부터 밭 50결을 하사받았다. 또한 같은 해 태종이 성수초례(星宿醮禮)를 상정하게 하자 태청관 보수와 천황대제의 재초(齋醮)를 함께 건의하였으며, 권근·하륜 등이 반대하자 고려 시대의 사례를 들어 도교 신앙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1407년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구금되었으나, 도교를 깊이 신봉한 태종에 의해 소격전(昭格殿)의 제조(提調)로 기용되어 도교 관련 자문을 계속하였다. 1411년에는 삼성(三聖)·주작(朱雀)·대국(大國) 등 도교의 신에 관한 태종의 하문에 고려의 전례를 근거로 답변하였다. 1415년에는 『성수경(星宿經)』을 태종에게 올렸으며, 같은 해 하륜이 그의 박학함을 높이 평가하여 육조판서에 임명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417년 사전(祠典) 제정을 명받았으나 이듬해인 1418년 사망하였다. 유교 중심으로 기반이 굳혀지던 조선 초기에 도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아울러 전고(典故)와 음률(音律)에 밝아 의례 상정과 아악(雅樂) 교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명이인으로 조선 중기(1502~1584)의 인물 김첨(金瞻)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인물의 묘와 관련 가족 묘에서는 '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이라는 국가민속문화유산(1987년 지정)이 출토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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