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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겸

김익겸(金益兼, 1614년~1637년)은 조선 인조 시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산성에서 분신 자결하여 순국한 인물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남(汝南),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출생과 가계

김익겸은 1614년 충청도 연산현(현 논산 지역)에서 아버지 김반(金槃)과 어머니 연산 서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이며, 형 김익희(金益熙) 또한 문신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성균관 유생으로 박선(朴璿)과 유평(柳玶)에게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와 관직 활동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진사시에도 3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강독관(講讀官)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과 순국

1636년 후금(後金)의 황태극(皇太極)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던 조선 사신 이확(李廓) 등이 청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이에 김익겸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청의 경축 행사에 참여한 사신과 용골대를 주살(誅殺)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확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같은 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김익겸은 성균관 강독관을 사직하고 강화도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켜 강화산성을 사수하며 항전하였다. 1637년 2월 16일(음력 1월 22일), 강화산성이 청군에 함락되기 직전, 강화유도대장 김상용(金尙容), 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남문에서 화약을 터뜨려 분신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날 강화도에서 순국한 사람은 모두 30여 명이었다.

사후 증직과 추모

사후 증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이후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광원부원군으로 가증(加贈)되었다.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에 있으며, 아버지 김반의 묘와 함께 '김반·김익겸의 묘'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묘비문은 당대 대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썼다.

가족 관계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며,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김만기(金萬基)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가 된다. 차남 김만중(金萬重)은 아버지가 순국한 달에 유복자로 태어나, 훗날 조선 시대 대표적 소설가이자 문신으로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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