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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1918)

김용(金龍, 1918~2001)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미군정 CIC 요원 및 대한민국 초기 정보·수사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본명은 김순재(金珣載)이며, 일명은 김일입(金一立)이다.

생애

1918년 3월 7일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 동천리에서 태어났다. 첫째 형 김경재(金璟載)는 만주국 신징(新京)에서 만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송지영, 박철원 등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39년 형 김경재가 중국인 재벌의 초청으로 상하이에서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발행하고 극장을 운영하자, 이곳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41년 2월 랴오닝성 번시후(本溪湖)의 아세아상공사 경리를 시작으로 다롄을 거쳐 상하이 동화산업공사에서 근무하였다. 이 무렵 중화민국 제3전구 사령장관부 조사실 소속 천더성 중위를 만나면서 항일 지하공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독립운동

1942년 형 김경재가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고 상하이시보가 강제 폐쇄된 후, 제3전구 사령부 조사실 소속 지하공작원이 되었다. 1943년 2월 왕징웨이 괴뢰 정권의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에 입학하여 송지영, 이일범 등 한국인 동창들과 교류하였다. 같은 해 6월 한족동맹(韓族同盟) 사건으로 동창들이 체포되자 박철원의 항전지역 탈출을 도왔으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1943년 3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입대하여 중국 제3전구 사령부 조사실에 파견되었고, 항저우·진화 지역에서 일본군 정보 수집 및 광복군 모집 공작을 수행하였다. 1945년 4월에는 진화 지역에서 일본군 보급로 차단과 철로 파괴, 보급창고 폭파 작전에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 당시 상하이 지역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상하이 지구 공작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상하이 판사처(辦事處) 처장을 맡아 교민 보호와 광복군 잔무 처리를 담당하였다. 1946년 3월 부산을 통해 귀국하였다.

귀국 후 황해도 황주 고향을 방문하였다가 북한 지역의 토지개혁과 숙청 상황을 목격하고 강한 반공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47년 봄 미군정 CIC 요원이 되었으며, 이때 꿈에서 용을 본 일을 계기로 이름을 김용(金龍)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남북한 좌익 세력의 자금 및 조직 루트 조사 등 반공 정보 활동에 관여하였다.

1948년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방북 시 경호를 맡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실 직속 사정국 특무실 부실장으로 대북 공작을 수행하였다. 1949년 사정국 해산 후 체신부 감리국 감사과장, 체신사업협회 상임감사로 근무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치안국 특수공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 과정에서 공작원을 파견하는 등 대북 정보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1년 12월 대북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육군특무대에 체포되었으나, 1958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서훈 및 사망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2001년 3월 23일 인천광역시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나의 길을 찾아』(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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