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으로,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동자이다. 본관은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자는 백춘(伯春), 호는 고우당(古愚堂)이다.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일본에 체류하다가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생애
초기 생애 및 개화 사상 형성
김옥균은 1851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병태(金炳台)의 서자로 태어나, 후에 김병온(金炳溫)에게 입양되었다.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재능이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7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당대의 실학자이자 개화 사상가인 박규수, 유대치 등에게서 서구 문물과 사상에 대한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선진 문명과 조선의 낙후성을 인식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김홍집,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파를 형성하였고, 이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꿈꿨다.
개화 활동 및 일본 시찰
김옥균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과정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조선 역시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귀국 후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의 내정 간섭과 조선 조정 내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갑신정변의 주도와 실패
1884년 12월 4일 (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동지들과 함께 우정총국(郵政總局)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구파(守舊派)를 제거하고 고종에게 개혁 내각 수립을 강요하여,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재정 일원화, 탐관오리 처벌 등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개화파의 개혁은 일본군의 소극적인 지원과 청군의 강력한 개입으로 인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핵심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망명 생활과 암살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약 10년간 일본과 오가사와라 제도 등지에서 은거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망명 중에도 조선의 개혁과 독립을 위한 활동을 모색했으나, 조선 조정은 그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암살 시도를 했다.
1894년 3월, 김옥균은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향년 44세였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송환되어 능지처참(陵遲處斬)당했으며, 그의 가족들 역시 큰 화를 입었다.
사상 및 평가
김옥균은 조선의 근대화를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서구 문물 도입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으며, 신분 차별 철폐와 민권 신장을 주장하는 등 근대적인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 방식, 일본이라는 외세에 대한 의존,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자 그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의 사상과 개혁 시도는 이후 갑오개혁 등 조선 말기의 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그는 복권되었고, 오늘날에는 근대화의 선구자이자 개혁가로 재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