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김세필은 1473년(성종 4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잠시 화를 입었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삼사(三司)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며 당시의 폐단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다.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왕도정치와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중종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년) 훈구파(勳舊派)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조광조, 김정(金淨) 등 사림파 핵심 인물들과 함께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김세필 역시 역적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파주(坡州)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해배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1533년에 사망했다.
학문과 사상 김세필은 김종직의 학풍을 계승하여 성리학적 도덕정치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는 실천적 도학(道學)을 강조하며 경연에서 왕도정치를 역설하고, 사림파의 이상적인 유교적 국가 건설을 꿈꿨다. 그의 학문은 당시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많은 후학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평가와 영향 김세필은 기묘사화로 인해 비록 정치적 뜻을 펼치지 못했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과 청렴한 인품은 후대 사림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의 좌절 속에서도 학문의 맥을 잇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후에는 신원(伸冤)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파주의 우계서원(牛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