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 다르크'라고도 불렸다.
생애 김명시(金命時)는 1907년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스베츠로바, 김희원(金喜元)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생선행상을 하던 어머니 김인석의 손에서 자랐다. 오남매 중 셋째였으며, 오빠 김형선과 남동생 김형윤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였다.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서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 문제로 중퇴하였다.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회의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으나 1927년 중퇴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중국에서는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 소속으로 조직부 및 선전부 책임을 맡았으며, 1927년 9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부인부 책임을 역임하였다. 1928년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 조직에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운동에 연루되어 신의주에서 체포되었고, 1933년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 후 만기 출옥하였다. 1939년 다시 중국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들어가 부녀복무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여장군' 또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숙청의 시기에 체포되었으며, 1949년 10월 10일 부평 유치장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언론은 그가 상의를 찢어 유치장 내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보도하였으나, 사인을 확정할 만한 자료는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서훈 사회주의 계열 활동으로 인해 서훈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2022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에 상세한 생애 기록이 수록되어 있으며, 저자 이춘의 『김명시: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등 관련 서적이 출간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