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유(金萬有, 1914년~2005년 12월 26일)는 일제강점기 제주도 출신의 항일운동가이자 의사, 재일교포 사업가이다.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아우르는 복잡한 이력으로 알려진 실존 인물이다.
생애
김만유는 1914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대동(大洞)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아버지는 김여홍(金麗弘), 어머니는 이창화(李昌花)이다.
향리의 개량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정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보성기독청년회 소속 학교에서 중등과정의 신학문을 배운 뒤 1931년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사회주의진화론』 등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항일 및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 만보산 사건이 발발하자, 같은 대정 출신인 김무안, 이갑문 등과 함께 이 사건을 규탄하는 격문 2,000여 매를 제작해 거리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본에서의 활동
1933년 출소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과대학의 전신인 일본의과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1943년 5월 도쿄 아라카와구에 니시아라이(西新井)병원을 설립하여 개원하였다. 1945년 연합군의 도쿄 대공습 때 병원 건물이 폭격으로 소실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되었을 때 무임소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0월에는 김천해와 함께 『해방신문』을 발간하고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9년 북한에서 밀파된 간첩 허길송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그 결과 『해방신문』은 발행 중단 처분을 당하였다. 이후 1953년 5월 니시아라이병원을 전문 치료 과목을 갖추고 다시 개원하였으며, 1973년 증축 공사를 통해 300병상이 넘는 병원으로 확장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
1982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결성 이래 최고액의 헌금인 22억 엔을 기증하였다. 1986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문수거리 대동강변에 '김만유병원'을 건립하고 명예원장을 맡았다. 이에 북한 당국은 그에게 '인민의사' 칭호와 '조선 교수' 칭호를 부여하였다. 김만유병원은 북한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북한 측 주장에 근거한 평가이다.
1990년대 이후 고향인 제주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2000년경 55년 만에 귀향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2002년에는 88세의 고령에도 평양의 병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사망
김만유는 2005년 12월 26일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1세였다. 장례는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부인 변옥배와 6남 4녀가 유족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및 한계
김만유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재일동포 사회에서의 의료·사회 활동, 그리고 북한에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한 점 등으로 다각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다만 그의 활동이 남북 분단과 재일조선인 사회의 정치적 갈등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남한과 북한 양측에서의 평가가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개인사 중 일부 세부 사항은 관련 기록 부족으로 확인이 제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