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金瑪利亞, 1891년 음력 6월 18일~1944년 3월 13일)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아명은 김근포(金槿圃)이다.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3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자이자 기독교 신자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다.
생애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고 숙부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로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이후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은닉하여 귀국, 3·1운동 사전 준비에 진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건강에 문제를 겪었다.
석방 후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11월 다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수학하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 문학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석사),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신학)를 수학하였다. 미국에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5년 귀국하여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끝까지 거부하는 신념을 지켰다. 1944년 3월 13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되어 대동강에 뿌려졌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독립기념관에 어록비가 세워졌고, 2019년에는 서울 종로구에 흉상이 건립되었다.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