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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김동인(金東仁, 1900~1951) 개요

김동인은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한국 근대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 문학 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 등이 있다. 아버지 김대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으며,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1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17년 아버지 사망 후 상속받은 유산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렸으나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고, 귀국 후 3·1 만세 운동 격문을 기초한 일로 다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배따라기〉(1921)로 문명을 얻었고,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발가락이 닮았다〉(1932), 〈붉은 산〉(1932), 〈김연실전〉(1939) 등 수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와 순수 문학을 주창하며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과 대립했다. 한국어에서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1935년부터 잡지 《야담》을 발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전향 의혹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성향으로 전환하여 1939년 일본군 위문 문단사절로 중국 전선을 방문했고,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매일신보에 황민화와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4년에는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연재했다. 이로 인해 2002년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변호하고 우익 문인 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한국민주당 당무위원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사업 실패, 불면증, 우울증,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극심한 고독과 가난 속에서 지냈다. 1951년 1월 5일, 6·25 전쟁 중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며칠 후 이웃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후 평가

사후 1955년 《사상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어 1956년부터 시상되었으며, 현재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선구자로 평가받는 한편,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요 작품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1919),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화사〉(1925), 〈광염 소나타〉(1929), 〈발가락이 닮았다〉(1932), 〈붉은 산〉(1932), 〈최선생〉, 〈김연실전〉(1939) 장편소설: 〈젊은 그들〉(1930~1931)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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