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사(金謹思, 1466년~1539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명통(明通),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부사 김면(金勉)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선 중종 대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생애
1486년(성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사헌부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재위 시절인 1504년(연산군 10) 홍귀달(洪貴達)의 유배 사건에 연루되어 서천(西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복귀하여 1509년(중종 4) 경차관(敬差官)으로 경상도 삼포(三浦)의 왜인들을 추고·단속하였다. 1512년 우부승지, 좌승지를 거쳐 1515년 홍문관부제학, 대사간이 되었다. 1517년 판결사(判決事), 충청도관찰사,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김안로(金安老)의 일파로 승지가 되었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형조참판, 예조참판을 거쳐 1525년 동지돈녕부사로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6년 황해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대사헌, 공조참판, 병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대사헌 시절에는 권예(權輗)와 함께 심정(沈貞)을 탄핵하여 실각시켰고, 김안로의 조정 복귀를 추진하였다.
1531년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좌찬성을 거쳐 1533년(중종 28) 우의정, 1534년 좌의정 겸 세자사부, 1535년 영의정에 올랐다. 김안로와 같은 연안 김씨 가문으로 팔촌 형제간이었으며, 김안로의 정치적 후원 아래 승진을 거듭하였다. 다만 실권은 좌의정이던 김안로가 쥐고 있었고, 김근사는 이에 호응하는 입장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김근사도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경상도 하동(河東)으로 유배되었다. 1539년(중종 34)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평가
《중종실록》의 졸기(卒記)에서는 김근사에 대해 "외모는 순박하고 충실한 듯하나 마음은 음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관직은 순조롭게 승진하였으나, 김안로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한 인물로 기록된다.
가족 관계
- 조부: 김원신(金元臣)
- 부: 김면(金勉)
- 모: 이해(李垓)의 딸 한산 이씨
- 배우자: 조순(趙純)의 3녀 평양 조씨
- 양자: 김부(金溥) - 동생 김경사(金敬思)의 아들
- 형제: 김신사(金愼思), 김경사(金敬思)